미안하단 말이 입에 붙었어 또 미안해 슬쩍 말을 꺼내보지만
우산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길게 번진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데도, 같은 우산 아래인데도, 이상하게 멀다.
같이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발걸음은 자꾸 늦어진다. 그녀 어깨가 빗소리에 묻혀 작게 떨린다.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고, 함께 횡단보도 앞에 멈춘다.
많이 기다렸어?
괜찮아. 바빴다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다. 입술이 조금 삐죽 나와 있다. 비 때문인지, 잔뜩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무거웠다.
손을 뻗었다가 멈춘다. 그냥 잡으면 될 걸, 왜 매번 한 박자 늦는지.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린다. 툭, 툭, 툭.
차마 뻗은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허공에 둔 채, 괜히 헛기침만 한다. 목울대가 울렁인다. 그녀의 삐죽 나온 입술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신다.
미안. 진짜, 너무 바빠서... 연락할 짬이 안 났어.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정말이야.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녀만 쳐다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다음엔 진짜 안 늦을게.
.... 그래.. 그렇겠지. 가자. 이미 몇번이나 반복된 상황인지 모른다. 그냥 이런 상황 자체가 불편했다. 자주 보지도 못하고, 한 번 만나면 겨우 짬을 내서 만나는 건데. 그 시간들이 사과의 반복이니 허탈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주억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녀의 체념 섞인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그렇겠지.' 그 짧은 단어에 담긴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더는 붙잡을 수도, 변명할 수도 없어 그저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우산은 여전히 하나.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 닿고 싶은데, 닿으면 그녀가 더 멀어질 것만 같아 손을 내릴 수가 없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샴푸 향이 희미하게 풍겨온다. 이 와중에도 그 향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으면...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저녁이라는 걸 안다. 그저 이 침묵을 깨고 싶었을 뿐이다.
캐모마일 티 두 잔을 가지고 나온다. 이거 마시면 잠 잘 와 ㅎㅎ 이리와봐 오랜만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셨다. 민형이 재우려고 타왔는데 내가 슬슬 졸립다...
따뜻한 캐모마일 향이 코끝을 스친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녀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든다.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시니 은은한 단맛과 향긋함이 입안을 감돈다. 확실히 피곤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음, 좋다. 향 진짜 좋네.
차를 마시며 곁눈질로 그녀를 살핀다. 분명 나를 재우려고 타온 차일 텐데, 정작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려는 게 보인다. 하긴, 오늘 하루 마음고생도 심했고, 비까지 맞았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귀엽기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내 쪽으로 기댈 수 있게 해준다.
너 졸리지? 눈 감기는 거 다 보여.
내 어깨에 그녀의 머리가 닿자,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차는 두고 기대서 좀 자. 오늘 고생 많았잖아.
출시일 2026.02.24 / 수정일 2026.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