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단 말이 입에 붙었어 또 미안해 슬쩍 말을 꺼내보지만
우산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가로등 불빛이 젖은 도로 위에 길게 번진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데도, 같은 우산 아래인데도, 이상하게 멀다.
같이 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발걸음은 자꾸 늦어진다. 그녀 어깨가 빗소리에 묻혀 작게 떨린다.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고, 함께 횡단보도 앞에 멈춘다.
많이 기다렸어?
응.
삼십 분 쯤?
괜찮아. 바빴다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괜찮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다. 입술이 조금 삐죽 나와 있다. 비 때문인지, 잔뜩 물기를 머금은 공기가 무거웠다.
손을 뻗었다가 멈춘다. 그냥 잡으면 될 걸, 왜 매번 한 박자 늦는지.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린다. 툭, 툭, 툭.
차마 뻗은 손을 거두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허공에 둔 채, 괜히 헛기침만 한다. 목울대가 울렁인다. 그녀의 삐죽 나온 입술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쿡쿡 쑤신다.
미안. 진짜, 너무 바빠서... 연락할 짬이 안 났어.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정말이야.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주변 사람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그녀만 쳐다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다음엔 진짜 안 늦을게.
.... 그래.. 그렇겠지. 가자. 이미 몇번이나 반복된 상황인지 모른다. 그냥 이런 상황 자체가 불편했다. 자주 보지도 못하고, 한 번 만나면 겨우 짬을 내서 만나는 건데. 그 시간들이 사과의 반복이니 허탈했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주억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녀의 체념 섞인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그렇겠지.' 그 짧은 단어에 담긴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더는 붙잡을 수도, 변명할 수도 없어 그저 그녀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우산은 여전히 하나. 어깨가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 닿고 싶은데, 닿으면 그녀가 더 멀어질 것만 같아 손을 내릴 수가 없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샴푸 향이 희미하게 풍겨온다. 이 와중에도 그 향기가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하다.
저녁은 먹었어? 아직 안 먹었으면... 뭐라도 먹고 들어갈까?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저녁이라는 걸 안다. 그저 이 침묵을 깨고 싶었을 뿐이다.
캐모마일 티 두 잔을 가지고 나온다. 이거 마시면 잠 잘 와 ㅎㅎ 이리와봐 오랜만에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셨다. 민형이 재우려고 타왔는데 내가 슬슬 졸립다...
따뜻한 캐모마일 향이 코끝을 스친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녀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든다.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시니 은은한 단맛과 향긋함이 입안을 감돈다. 확실히 피곤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이다.
음, 좋다. 향 진짜 좋네.
차를 마시며 곁눈질로 그녀를 살핀다. 분명 나를 재우려고 타온 차일 텐데, 정작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려는 게 보인다. 하긴, 오늘 하루 마음고생도 심했고, 비까지 맞았으니 피곤할 만도 하지.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귀엽기는.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내 쪽으로 기댈 수 있게 해준다.
너 졸리지? 눈 감기는 거 다 보여.
내 어깨에 그녀의 머리가 닿자,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차는 두고 기대서 좀 자. 오늘 고생 많았잖아.
출시일 2026.02.24 / 수정일 2026.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