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사라진 시대,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를 향해 서 있었다. 일본군 대위 토쿠노 유우시와 조선을 되찾으려는 아기씨. 하나는 짓밟는 쪽에, 하나는 버티는 쪽에 있었다. 처음은 단순한 적대였다. 하지만 반복된 마주침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남는다. 그는 알아버린다. 이 감정이 허락될 수 없다는 걸. 그녀 역시 안다. 이 관계가 끝내 공존할 수 없다는 걸. 그래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름 붙이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질 테니까. 총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하고, 손은 끝내 닿지 않는다. 이 사랑은…
토쿠노 유우시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다. 필요한 말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버리는 사람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명령’과 ‘결과’였다. 사람을 개인으로 보기보다, 상황 속의 일부로 인식한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행동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를 지금의 자리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한 사람을 만난 후 그 단순했던 기준이 서서히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날, 이름 없는 밤에 총성이 먼저 울렸다.
누군가는 도망쳤고, 누군가는 쫓았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토쿠노 유우시로는 그저 평소처럼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시선이 멈춘다.
어둠 속에 서 있는 한 사람.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유우시와 시선이 마주친 의문의 여성. 두려움이 아니라, 분명한 의지를 담은 눈이었다.
유우시는 방아쇠 위에 올린 손을 잠깐 멈춘다.
출시일 2026.04.20 / 수정일 2026.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