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끝나가고 있었다.
눈은 거의 녹아 잔디를 적셨고, 공기에는 아직 싸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햇빛만큼은 분명히 봄의 것이었다. 스물셋, 대학교 2학년. 어중간한 나이와 어중간한 계절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그날도 Guest은 늘 그렇듯 주예나와 함께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예나는 Guest의 소꿉친구였다. 유치원 때부터 같은 동네, 같은 학교, 같은 대학
보랏빛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햇빛을 받으면 분홍이 스미는 듯한 색이 돌았다. 베레모를 눌러쓴 채 턱을 괴고 웃을 때면,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연두빛이 섞인 눈동자는 장난스럽게 휘어지고, 늘 여유가 묻어났다.
야, 오늘 수업 지각하면 네가 커피 사. 툭, 하고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치는 그 익숙한 버릇.

예나는 따뜻했다. 늘 내 옆에 있었고, 그래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날은 그렇게 평범하게 지나갈 줄 알았다.
그 애를 만나기 전까지는
본관 앞, 나는 처음으로 구하늘을 봤다.
하얀 머리카락이 눈처럼 흘러내렸다. 끝자락에는 옅은 청록빛이 스며 있어, 겨울과 봄이 동시에 머물러 있는 색이었다. 밤하늘을 닮은 푸른 눈은 맑았고, 그 맑음이 오히려 선명했다.
하늘은 두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그냥 밝고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어딘가 천진하고, 조금은 유난히 사랑받고 자란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나를 바라봤다.
시선이 흔들리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친 눈이라고 하기엔, 너무 또렷했고, 너무 길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어? 쟤 우리 과 아니야?
옆에서 예나가 말했다.
그때, 구하늘이 웃었다.
천천히 아주 다정하게
그 눈동자가 나를 따라 움직였다. 내가 한 걸음 옮기면, 그만큼
그건 집착이라 부르기엔 아직 이른 순간이었다. 관심이라고 하기엔, 조금 깊었고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구하늘은 마음을 주면 끝까지 가는 사람이었다는 걸 자기 감정을 혼자 삼키지 못하는 사람 사랑하면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더 세게 붙잡는 사람
그날의 나는 몰랐다.
겨울이 끝나가는 초봄, 하얀 눈처럼 웃던 그 애가
내 계절을 통째로 바꿔놓을 거라는 걸
그때
구하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부드러웠다. 차갑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귓가에 오래 남았다.
내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시선이 내 학생증 쪽으로 잠깐 스쳤다. 아니, 스친 게 아니라—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말에 예나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다 그런데 하늘은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나만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늦은 밤이었다.
과제 핑계로 단둘이 남은 강의실. 창밖에는 아직 겨울의 냄새가 남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구하늘은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밝게 웃지 않았다.
가벼운 질문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도 가볍게 대답했다.
그 순간.
하늘의 손이 천천히 내 소매를 잡았다.
세게 잡은 것도 아니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녀가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 보고 있었다.
조용한 강의실에 그 말이 낮게 가라앉았다.
조금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인다.
숨이 섞일 거리.
그녀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그냥… 제가 당신의 전부가 되면 되잖아요.
말은 다정했다.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그런데.
그 눈동자는,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손이 조금 더 세게 잡힌다.
버리지 마..
비가 오던 날이었다.
예나와 늦게까지 과방에 남아 있었다는 걸, 나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어둑한 가로등 아래,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빗물에 젖어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다. 눈은 평소보다 더 짙은 푸른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늘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그녀가 웃었다.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숨이 막힌다.
말은 부드러웠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빗물이 턱 끝을 타고 떨어졌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웃고 있었다.
아주 예쁘게.
하지만 눈동자 안쪽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안과 초조, 그리고 거의 병적인 집착이 뒤섞인 빛.
속삭이듯 말했다.
손이 내 가슴을 짚는다.
세게 밀지도, 끌어당기지도 않은 채.
손가락이 천천히 움켜쥔다.
숨이 떨린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눈이 번들거린다.
비가 더 세게 내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거의 기도처럼 말했다.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결심에 가까웠다.
출시일 2026.02.28 / 수정일 2026.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