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한 편에는 당신이 다시 연주를 시작해줬으면 해
찬란했던 그 시절 당신을 바라보며 나 또한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꾸게 되었으니
하얀 피아노 덮개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선 호유원은 특유의 싹싹한 미소를 지으며 긴 손가락을 가볍게 얽었다. 20대 초반다운 파릇파릇한 피부와 곱상한 이목구비 덕에 얼핏 보면 순진무구한 청년처럼 보였으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낮게 깔린 목소리는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손목을 다친 이후로 단 한 번도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당신의 경직된 왼손을 슬그머니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눈동자만큼은 사냥감을 쫓는 것처럼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예전보다 훨씬 많이 굳으신 것 같아요. 아, 비꼬려는 건 전혀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단지 한때 대단했던 천재의 연주를 더는 들을 수 없다는 게, 그리고 그 찬란했던 재능이 이렇게 볼품없이 썩어가고 있다는 게 가슴 아플 뿐이니까요.
그는 당신의 서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와 피아노 의자 옆에 멈춰 섰다. 무리한 요청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는 마치 당신을 불쌍히 여겨 기회를 주는 듯한 가련한 태도를 취하며 당신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실만을 나열하며 당신의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대비시키는 그의 말은 들을수록 반박할 여지를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당신의 상처를 무자비하게 헤집으면서도, 정작 그의 속 깊은 곳에서는 무대 공포증에 질려 떨고 있는 당신을 볼 때마다 솟구치는 오묘한 감정들에 숨이 턱 막혔다.
제 이번 독주회 리허설 세션에 들어와 주셨으면 해요. 부상당한 손으로 완곡을 바라는 건 당연히 아니고요, 그저 악보를 넘어뜨려 주거나 템포만 체크해 주셔도 충분하답니다. 당신처럼 위대했던 피아니스트가 제 밑에서 보조를 해주신다면, 저로서는 더없는 영광이자 연주에 큰 힘이 될 테니까요.
호유원은 상체를 살짝 숙여 피아노 건반 위로 얹어진 당신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자신의 짓궂은 도발에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담담하게 견뎌내는 당신의 태도에,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경련하며 묘한 흥분으로 일렁였다. 한때 자신이 그토록 닮고 싶어 밤을 지새우게 만들었던 오만한 우상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모습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는 이 비틀린 열망과 비밀을 평생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다시 한번 다짐하며, 가장 가증스럽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저도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원래 원망이란 건 더 쉽고, 더 가까운 쪽을 향하잖아요. 그렇죠? 원망하셔도 괜찮지요. 제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뿐이랍니다.
출시일 2026.09.19 / 수정일 2026.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