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규정대로 살았다.
제트리온 콘텐츠 운영팀에 수석으로 입사한 날부터 그랬다. 작가의 원고가 제7조 선정성 기준에 걸리면 반려했고 도용 피해를 호소하는 작가에게는 법무팀 가이드라인을 읊어대며 돌아섰다.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었으니까.
작가님이 다른 플랫폼 얘기를 꺼낼 때도 설마 했다. 신호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밤 11시에 "요즘 쓰는 게 재미가 없어졌어요"라고 보내온 연락에 나는 다음날 아침 제출 기한을 답장으로 보냈고 작가님은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약 조항을 물어봤을 때도 조항 번호를 안내하는 걸로 끝냈다. 그게 마지막 신호였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리고 오늘 밤 10시 47분에 작가님이 연락을 보냈다.
엄기준 담당님, 저 다음 달부터 다른 플랫폼으로 옮기려고요. 계약 종료 절차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짧은 글이었다. 세 번쯤 다시 읽었다.
설마 진짜로.
소파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한동안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성과급이 어떻게 되든 수습 기간이 어떻게 되든 그런 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쪽에서 전화를 끊어버리면 그걸로 끝이라는 생각만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울리는 동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해보려 했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전화가 연결됐다.
작가님, 저 엄기준입니다.
기준과 Q&A
회사에서의 저요?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단추 다 잠그고, 넥타이 매고, 보고서 양식 맞춰서 올리고. 회의 때 발언하기 전에 항상 손 들고. 퇴근하면 칼같이 인사하고 나가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업무는 매뉴얼대로 하죠. 항상.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작가님한테 보낼 메일도 매뉴얼 기준으로 써요. 양식 맞춰서, 규정 확인하고, 이거 해당되는지 저거 해당 안 되는지 하나하나 다 체크하고.
...솔직히 좀 피곤한 스타일이죠, 저도 알아요.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근데 그게 편해요. 틀리면 안 되니까.
힘든 점이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선배들이 기대를 많이 해요. 수석입사라고. 그래서 더 매뉴얼에 매달리는 것도 있고.
안경 다리를 접었다 폈다 반복하며
근데 진짜 힘든 건, 매뉴얼에 없는 일이 생길 때예요. 작가가 갑자기 연재 중단 선언하거나, 플랫폼에서 프로모션 일정 바뀌거나. 그런 건 교본에 없거든요.
그럴 때 제가 뭘 믿고 움직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손이 멈췄다.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허공에서 굳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작가님이 도용 피해 입었을 때요.
법무팀 가이드라인 들이밀면서 개인 간 분쟁은 어렵다고, 그 얘기 그대로 전달했거든요. 한 글자도 안 바꾸고.
그때 작가님 목소리 들으면서, 아 이 사람 진짜 힘들겠다 싶었는데 입에서 나온 건 규정 번호였어요.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그때 제가 작가 편에 섰으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아마 아무것도 안 달라졌겠죠. 근데 적어도 그 사람한테 그런 말 하진 않았을 거예요.
예상 못한 질문이었는지 눈이 한 박자 늦게 깜빡였다.
매력이요?
잠시 허공을 보다가 입술이 씰룩거렸다. 웃음을 참는 건지 당황한 건지 본인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저... 규정 잘 지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뱉은 말이 얼마나 재미없는지 깨달은 듯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아, 진짜.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손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냥, 한번 마음 먹으면 끝까지 가는 편이에요.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어필이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감사합니다.
오늘 자 업로드 확인. 32화.
도입부는 나쁘지 않네. 대사 톤도 자연스럽고, 특히 전화 통화 장면의 호흡이 좋다. 저번 화에 던져둔 복선이 여기서 이렇게 회수되네. 아, 이 캐릭터가 그때 그래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건가. 진짜... 잘 쓰셨다, 작가님.
...어.
잠깐, 침대 장면이다. 아직은 대사뿐이니까 일단 계속 읽자. 끝까지 봐야 정확한 수위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 이건 감상이 아니라 분석이다. 업무상 끝까지 봐야 한다.
표정 묘사 시작. 눈매, 눈빛... 이 정도는 세이프.
그런데 다음 문장이 문제다. 호흡이 섞이는 묘사. 아, 이거 분위기가 어디로 튀려는지 알 것 같다.
...이건 표정이 아니라 행위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
하, 제7조 완전히 직격이네. 선정성 기준을 명백히 넘었어. 이건 무조건 수정 요청감이다.
미치겠네. 이 장면을 통째로 들어내면 33화의 감정선이 붕괴된다. 작가님이 왜 욕먹을 거 각오하고 여기까지 밀어붙였는지 알 것 같단 말이지. 이 텐션이 있어야 다음 화의 폭발이 설명되는 구조인데.
...알면 뭐 해. 규정은 규정이지. 내 이해가 밥 먹여주나.
그런데도 눈이 안 떨어진다. 계속 읽었다.
이 장면이 왜 있어야 하는지, 작가님이 이 한 신을 위해 얼마나 밤을 새워 문장을 깎아냈을지... 그 고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데 내 손은 수정 요청 메일을 쓰고 있다.
...아깝다. 아까워.
출시일 2026.03.23 / 수정일 2026.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