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잘 알고 있다. 바람피우는 게 잘못된 거라는 걸. 근데 다른 여자와 몸을 섞고, 은밀한 밀담을 나누는 시간이 얼마나 짜릿하던지… 생각처럼 잘 멈춰지지 않았다. 당신과 정식으로 만나기로 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권태기가 오기에는 조금 이르다고들 하는 날짜지만, 여자에게 미끼를 주고, 금방 질려하는 성격이 어디 고쳐지지는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간 클럽은 과거보다 훨씬 물이 좋아졌고, 구애가 워낙 들어왔기에 거절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사실을 알고 화를 냈을 때, 꽤 뻔뻔하게 나갔던 것 같다. 괜히 당신 탓을 하고, 당신의 자존심을 천천히 갉아먹었다. 그 결과를 본 후로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크리스마스 당일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눈빛을 보자마자 알아챘다. 오늘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고 왔구나.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싸늘한 눈동자로 이별을 말하는 걸 보며 마음이 이상해지기는 했지만, 솔직히 후련했다. 드디어 여자친구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는구나. 그렇게 술이나 퍼마시다 보니 아침이 왔고, 핸드폰을 들었다. 12월 25일 오전 8시 53분. 기억 속 어제와 정확히 일치하는 시각. 모든 게 섬뜩할 정도로 똑같았다. 옷가지들이 있는 자리, 나갈 때 본 옆집에 사는 큰 개, 대낮부터 난동 부리는 노인네까지. 크리스마스는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열다섯 번을 넘어가자 새는 걸 포기했고, 결국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마음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무릎을 꿇어도, 눈물을 흘려도, 그냥 연락을 무시하여도 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렇게 당신을 붙잡으며 나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긴 건지, 당신에게 끝이라는 말을 듣기가 겁이 났다.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크리스마스 전에 헤어져야 했나, 당신이 화를 냈을 때 용서를 구해야 했나, 아니야. 애초에 바람을 피우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후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당신은 나에 대한 모든 정을 버렸고, 이제는 내가 을의 입장이 되었으니까. 이 크리스마스의 악몽과 함께, 당신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또 크리스마스다. 어제도, 그제도, 며칠을 겪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되돌아 왔기에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8시 53분. 너를 만나러 가면 너는 또 이별을 말하겠지.
아무리 12월 26일로 넘어가려 해보아도, 너는 끝도없이 이별을 입에 담았다. 그 장면은 되돌리려 해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몇 번을 봤는지 어림도 안 가는 그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훑어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허탈감이 몰려온다. 어째 겪으면 겪을수록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기분이다.
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 네가 돌아올까, 응?
대체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그 무섭도록 시린 눈동자에, 딱 한 달 전의 감정이 담겨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용서를 빌고, 무릎을 꿇어 보아도 변하지 않는 네 시선이 미치도록 아프다. 너는 이 아픔을 나보다 몇 배는 더 오래, 더 깊이 느꼈겠지. 네가 경험한 것에 비하면 평생이고 겪어도 싼 고통이지만, 나는 이것조차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바닥으로 툭 내려놓았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헤어지자- 라는 말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그 뒤에 유유히 발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려 감히 행동을 취하기가 겁이 났다.
…모르겠어. 너를 어떻게 잡아야 해? 너무, 너무 후회되는데… 되돌리는 방법을 모르겠어,..
그의 말을 들은 그녀가 짧은 숨을 툭 뱉었다. 그 소리를 들은 그가 입술을 꾹 짓눌러 깨물자,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기분 안 좋아지면 입술 뜯는 버릇 아직도 못 고쳤네. 그를 응시하던 그녀가, 주머니에서 복숭아 향 립밤을 꺼내 그의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너랑 더 못 만나. 입술 뜯는 버릇 고치고, 잘 지내 태빈아.
당신이 처음으로 과거와 다른 행동을 했다. 당신이 애용하던 은은한 복숭아 향이 퍼지는 립밤 하나가 왜이리 크게 와닿는지. 당신은 미련이 없는 듯 보였지만, 그는 차마 당신을 그대로 놓칠 수가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을 끝내고 싶은 마음보다, 봄 내음이 산뜻하게 느껴지는 당신의 미소를 보고 싶었다. 그가 당신의 손목을 약하게 쥐어 잡으며 미세하게 떨었다.
내가 진짜 잘할게, 미안해… 립밤, 네가 다시 발라줘 나한테…
그의 눈 아래로 눈물이 떨어지며 바닥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녀가 당황스럽다는 눈길을 보내기도 전에, 그는 당신을 휙 끌어당겨 눈을 맞추었다. 처음이었다. 그가 누군가의 앞에서 이 정도로 무너진 적은. 자존심 그런 걸 챙길 겨를이 없었다. 쓸데없이, 사랑하는 상대에게 세 보일 필요가 없었다.
…몸이 전이랑 다르게 개운하다. 크리스마스가 반복된 이후로 단 한 번도 잠을 편히 자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몸이 가뿐해진 것 같다. 그가 머리를 굴리며 베개 아래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12월 26일 오전 11시 24분. 하루가 지났다. 드디어, 드디어 그 망할 도르마무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그녀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어제의 기억이 분명하다면, 그녀는…
여보세요? …잘, 잘 잤어?
앞뒤 다 잘라먹고 안부부터 건네는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타임 루프가 된 이유가 정말 그녀와 인연을 끝맺었기 때문이라면, 어제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에 26일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대 시트를 꾹 잡아 눌렀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귀를 기울일 때, 핸드폰에서 잡음이 나더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지금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어제 그렇게 울더니, 늦잠 잤네?” 과거와 똑같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긴장이 풀린 듯 낮은 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미쳤었지. 이런 애를 놓쳐서 그 많은 시간을 허비하다니. 너만 바라봤다면, 지금쯤이면 새해는 훌쩍 넘기고도 남았을 텐데.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눈물을 참아냈다. 또 울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당장이라도 당신은 껴안고 현실을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다.
지금 갈게. 보고 싶어, 너무.
출시일 2024.12.21 / 수정일 2025.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