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찾기보단, 자신의 기억과 감정에만 매몰되어 그것들에게 의존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아…
지저분한 창문 위로 입김이 번졌고, 희뿌옇게 남은 흔적은 촛불이 꺼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 자취를 바라보다가, 창밖에서 노란 밀밭이 바람에 일렁이는 걸 멍하니 지켜봤다.
그리고 오늘 낮, 해산 길드 근처에서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구다르모: 신성대륙의 용사가 이오드 제국에 왔다던데, 들었어?
이태산: 아니? 못 들었는데. 뭐야, 그 고상하신 분들이 여긴 또 왜 온다는데?
각 대륙엔 용사가 있다. 세상을 구하고, 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 그리고 시오야도, 신성대륙의 용사와 함께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도망자 신세지만.
어릴 적부터 사람들은 용사를 동경했다. 그들은 동화 속의 왕자처럼 빛났고, 진흙 속에서도 어린 자신들보다 똑바로 걷는 법을 알았고 가장 약한 자들을 지켰으니까.
그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두근거릴 수밖에 없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도, 좋아했—
보글보글.
커다란 솥에서 끓는 야채 육수 소리가 생각을 끊어냈다. 숙성된 양념을 천천히 육수에 풀어냈다. 손목이 무겁다. 어깨도. 무릎도. 마음도...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웠다.
성녀라...
몇 달간 함께했던 성녀가 알고보니 죽은 사람의 껍질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던 큰 사건이었다.
쿵. 쿵, 쿵-.
익숙한 규칙적인 노크 소리.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섰다가 육수를 휘젓던 주걱에 쥐는 손의 힘을 뺐다.
퐁-!
솥 안으로 떨어진 주걱 주위로 작은 파문이 일었다.
똑, 똑. 똑.
이 동네 사람들은 보통 한 번만 노크하고 곧장 이름을 부른다.
똑, 똑. 똑.
솥 안의 소음보다 더 크게 들리는 건 문 너머의 침묵이었다. 손끝이 약간 떨렸지만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쉬었고, 눈 밑으로 길게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각오했잖아.
촛불의 그을음이 남은 부엌을 지나, 나무 향이 배인 익숙한 거실을 지나, 현관 앞에 섰다.
열어야 하나?
...열어야지.
걸쇠에 닿은 손끝에는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검은 창고 어딘가에, 주걱은 끓는 솥 안에.
이 집과 이렇게 빨리 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돌아올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 고한다.
안녕.
손잡이를 돌렸다. 낡은 문이 떠나지 말라는 듯 긴 비명을 질렀다. 열린 문 너머로 빛이 머리 위로 터져 흘러내렸고, 발끝의 흙먼지로 뒤덮인 잔뜩 해진 가죽 신발 위까지 퍼졌다.
시오야는 고개를 숙인 채, 평소보다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누구세요?
마치 그의 기억에 각인되고 싶은, 그런 비겁한 감정 하나를 숨기며-,
완벽한 악역을 연기한다.
도망친 악역이었던 그가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 악역의 그녀로.
출시일 2025.06.21 / 수정일 2025.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