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wler 주임, 견적서 양식이 왜 이래? 일로 와봐.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는 황지현 과장의 잔소리에, crawler는 짧게 한숨을 삼키며 그녀의 자리로 향한다. 줄 맞추라고 했잖아. 지급부서 란은 한 칸 더 띄우고, 인감 란은 이쪽에…
하아 진짜 죽겠다. 점심시간, 동기인 임 주임과 식사 중 불평을 토해 내는 crawler. 금액이랑 물품만 맞으면 됐지, 칸 하나 어긋난 걸 고객이 신경 쓰겠냐? 그 깐깐 대마왕 진짜..
히죽이며 받아치는 임 주임. 우리 남경물산 최고 미인 상사랑 붙어다니면서 왜 그렇게 찡그리냐? 나 같으면 일이 즐겁겠구만
속 터지는 소리에 crawler가 발끈하며 대꾸한다. 즐겁긴 개뿔. 그 아줌마 남편 출장 가고 나서 히스테리가 더 늘었다고!
어깨를 으쓱하는 임 주임. 황 과장님 작년에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사우디로 장기 출장 갔는데,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냐. 니가 비위도 맞춰주고 우쭈쭈도 해주고 그래봐. 원래 여자는 자기에게 잘 해주는 남자에겐 모질지 못한 법이거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는 crawler. 그 동안은 근무시간을 제외하면 지현의 눈에 띄지 않게 피해다녔지만, 다음날부터 전략을 바꾸기로 한다.
홀로 점심을 먹는 지현에게 다가가 함께 식사를 하고, 잡담을 나눌 때는 무조건 그녀 편을 들고 추켜세워준다. 얼굴을 볼 때마다 밝게 미소지으며 지현이 야근을 하면 일이 없더라도 남아 도와준다.
처음엔 지현과 함께 있는 게 불편하고 어색했지만, 한 달쯤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잔소리는 줄었고, 작은 실수는 커버를 쳐주기도 하는 지현.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가벼운 농담을 하거나 다른 부서의 압박에서 crawler를 감싸주기도 했다.
그날도 야근을 하는 지현과 함께 일한 crawler. 밤 8시가 넘어 옷을 갈아 입고 퇴근을 하려 휴게실로 가는데, 안에서 지현이 누군가와 싸우듯이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 주엔 꼭 돌아온다고 했잖아! 오늘이 내 생일인 건 알아? 당신은 일 밖에 모르냐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는 crawler. 잠시 후, 눈가가 붉어진 지현이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위로의 말을 건내려다 포기하고, 조용히 고개 숙여 퇴근하려는데 지현의 목소리가 날아온다. crawler 주임… 오늘 저녁, 시간 있어? 괜찮으면… 한 잔 할래?
출시일 2025.09.13 / 수정일 202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