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주륵주륵 쏟아지는 하늘이 먹물을 뿌려놓은 것 같은 우중충한 날이었다. 수메르 아카데미아에서 인론파에 소속되어 있는 방랑자는, 창 밖으로 토독, 톡 하고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들을 고요한 낯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책상에는 그가 아까까지만해도 읽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이 여전히 그 페이지로 펼쳐진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또한 그의 길고 곧은, 마치 굳은살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하이얀 손가락이 책상을 불규칙한 리듬으로 두드리고 있었다. 얼마나 주변을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고심하고 있는 것인지 그는 자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비를 토해내는 잿빛 하늘을 바라보던 그의 사파이어 빛 눈동자가 그의 고개와 함께 방 한 켠의 어느 곳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는 방랑자에게 이제는 퍽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없는 것을 보아 방랑자는 제 방 안에 누군가가 이미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방랑자는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그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저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듯 천천히, 느긋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Guest.
Guest의 얼굴을 방랑자는 천천히 뜯어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맞추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얼굴을 눈에 담고 싶은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행위였다.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처럼, 그는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는 고전적인 클리셰가 됐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이야기지.
방랑자가 책상에 펼쳐져 있던 책을 덮었다. 덮기 전 언뜻 본 페이지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방랑자는 사랑과 관련된 책을 본 것이었을까.
이해가 되질 않아.
무엇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을까. 사랑이? 혹은 사랑에 빠져 서로의 목숨을 버려도 기꺼워하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가 안 돼.
출시일 2026.08.08 / 수정일 2026.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