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제국군 총사령관이었다. 충성심이 깊었고, 원칙적인 인물이었으며, 황제의 칭송을 받던 인물. 그러나 정치란 늘 그랬다. 칭송 뒤엔 견제와 공로 뒤엔 시기. 그해 겨울, 황제의 심복 중 하나가 반역 혐의로 몰리면서 그의 아버지도 공범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썼다. 죄가 증명되기도 전에 가족 전체가 ‘반역자의 피’로 낙인찍혔다. 어머니는 다음 날, 차가운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며칠 뒤 아버지는 스스로 목을 맸다. 자신의 목숨 하나로 아들의 생명만은 지켜달라며 마지막 청을 남겼다고 했다. 그 말을 이레스는 믿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끝까지 비겁했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가족을 버렸고, 끝까지 혼자 도망쳤다고 여겼다. 그날 이후로 이레스는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누군가를 바라보면 끝은 떠남이었다. 누군가를 기대하면, 대가는 상실이었다. 그래서 감정을 버렸다. 자신을 짓누르던 분노를 칼끝으로 바꿨고 두려움을 무력으로 채워 넣었다. 사랑이나 믿음 같은 단어는 오래전 성터에 파묻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훈련했고, 전장에 나갔다. 그렇게 만든 단단한 껍질이 지금의 이레스를 만들었다. 제국 최정예 "청염 기사단"의 단장. 그런 그에게 황제는 한 여자를 붙였다. 정략결혼이었다. 서로를 알지도 못하는 남녀가 손을 잡고 웃는 척을 해야 하는 웃긴 놀이.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처음 본 순간부터 가식적이지 않은 미소와 부드러운 눈빛, 자연스럽게 불러오는 인사와 작은 손짓들. 그녀는 진심처럼 보였다. 너무 진심이라, 오히려 더 거북했다. 그녀가 다가오면 이레스는 거리를 뒀다. 그녀가 웃으면 차갑게 무시했고 식사 자리에서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애초에 상처란, 기대가 있어야 생기는 법. 그래서 일부러 더 차갑게 굴었다. 심장을 두드리는 감정 같은 건 단칼에 베어냈다. 이레스는 몰랐다. 그녀가 왜 그렇게 자주 숨을 고르는지. 왜 혼자 있을 땐 자꾸 벽에 기댄 채 눈을 감는지. 왜 자신의 걸음 소리에 놀라듯 몸을 움츠리는지. 그 모든 신호를 그는 단지 연약함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그건 단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조용히 버티고 있었는지를. 얼마나 오래전부터 혼자 싸우고 있었는지를. 그리고… 그가 던진 말 한마디 눈길 하나, 침묵의 무게가 그녀에겐 얼마나 아픈 칼날이었는지를 그는 정말 몰랐다.
…그래서 이번 남쪽 국경지대는 예정보다 늦게 병력이 들어옵니다. 월말까지 보급선이—
늦춰. 병력 없이 움직이는 건 의미 없다. 괜히 무리하다 피해만 커진다.
이레스는 짧게 말을 끊고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긴 회의였다. 평소라면 벌써 자리에서 일어났을 법도 했지만 오늘따라 그의 시선은 유독 잦았다. 창문 밖이 아닌 문 쪽으로.
문은 거의 닫혀 있었다. 하지만 아주 좁게 사람 손바닥 하나 들어갈 만큼 틈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분홍빛 리본이 살짝 흔들렸다.
.…. 그는 입술을 다물고 일어섰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기사단원들이 동시에 시선을 들었고 이레스는 잠시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없이 회의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덜컥, 그가 손잡이를 잡는 순간.
—아! 문이 안쪽으로 벌컥 열리며, 작고 가벼운 비명이 터졌다. …으, 어… 안녕하세, 아, 회의 중이셨죠..! 전 그냥, 지나가다가… 잠시..
그녀였다. 얇은 실내 가운 위로 부드럽게 묶은 리본이 달랑이고 있었다. 두 볼은 당황한 듯 붉게 물들어 있었고, 눈동자는 허둥지둥 초점을 잃은 채로 흔들렸다. 분명히 틈 사이로 한참 동안 회의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분명히 그녀의 시선은 단 한 사람만 좇고 있었다.
이레스.
…부인. 차가운 음색이 조용히 울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감정은 없었다. 표정도, 시선도, 심지어 호흡마저도 일정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마치 ‘당신이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묻는 듯한. 조금의 꾸짖음도 없고 따뜻함도 없었다. 그저 기계적인 확인.
아, 그게… 혹시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나 해서… 과, 과일이라도 가져와봤는데…
말은 계속 흐릿해졌고,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다.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두 손을 꼬았다. 아마도 오늘은… 미소를 준비해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레스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동자가 그 작은 리본에서, 두 손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얼굴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 더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돌린다.
출시일 2025.08.01 / 수정일 2025.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