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나나 어차피 똑같은 엔딩일텐데.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잘하는 거. 그딴 걸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내 인생은. 아빠는 술 없이 살 수 없었고 이에 지친 엄마라는 사람은 아들을 두고 떠나버렸다. 남은 건 나 혼자였다. 그렇게 커가던 그 어린 애는 어느날 고등학생이 되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나쁜 길로 새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잘 나가던 형들, 결국엔 어른들까지. 고등학교 때부터의 내 인생은 어린 찌질이와는 달라졌다. 겨우 졸업장을 따내고 들어간 곳은 위험천만한 소굴이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밥 주고 돈 주고 잘해주는 사람들은 다 거기에있는데. 한때 나라를 뒤흔든 그 조직, 장향. 보스라는 사람은 날 참 예뻐했다. 자기 어렸을 때 보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래도 덕에 그곳에서의 생활을 평탄했다. 보스는 물론 형들과도 완만한 관계를 이어갔으며 간간히 업소에 나가 만나는 여자들과의 밤은 완벽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게, 어렸을 때의 기억을 다 잊게 해준다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저 불 좀 빌려주세요. 너와의 첫만남이었다. 길게 늘어진 옅은 갈색머리. 누가봐도 노골적이게 딱 달라붙은 옷을 입은채로 골목에 비척비척 들어와 불을 청하는 너는, 내 어렸을 그 개같은 기억을 떠올리기에 완벽했다. 홀린듯 네 눈을 응시하다가 라이터를 건냈다. 아무런 기색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후 내뱉으며 다시 나에게 라이터를 돌려줬다. 말 없이 담배를 피우다 다 까진 뒷굼치로 신은 하이힐이 떨어진 꽁초를 비볐다. 다시 터벅터벅, 골목을 빠져나가는 너를 따라갔는데. 마주친 현실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The cherry. 조직에서도 분명히 들어봤던 유명한 룸이자 업소였다. 아가씨였구나, 그 앳된 얼굴이.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유없이 몇 시간을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기다렸다. 앞에 떨어진 꽁초가 몇개인지 잘 모르겠다.
띠링―. 문이 열리고 네가 나왔다. 속이 안 좋은지 나오자마자 편의점으로 뛰쳐가 숙취해소제를 쪽 빨아마시며 나오는 걸 봤다. 하, 씨발. 안 좋은 습관은 달고 사는 건지, 다 마시자마자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입에 무는 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몇 번을 달깍거리더니 이내 포기하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에 쥐었다. 아, 내가 또 백마탄 왕자님처럼 나타나줘야겠구나.
불이 또 필요하겠네.
아까 본 남자였다. 사람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닌데, 그 어두운 골목에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해 머릿속에 박혀있었던 모양이다. 매일같이 술에 쩔어있던 아저씨들이나 상대했던 탓인지 화려한 얼굴이 잊히질 않았던 건가. 홀린듯 그가 건낸 라이터를 받아들었다. 아무 무늬 없는 검정색 라이터. 그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감사합니다.
달깍. 라이터에서 불이 올라오고, 담배에 붙이고, 다시 그에게 건냈다. 아까와 데자뷰같다. 근데 이 사람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거지.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만 쳐다보는 너를 관찰했다. 무릎 전까지 오는 부츠에 짧은 치마 그리고 딱 붙은 상의. 누가봐도 저 강남 술집에서 일해요, 하는 차림새가 웃겼다. 이러고 다니면 누가 안 채가나. 얼굴은 또 왜이렇게 예뻐서.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제야 눈높이가 좀 맞는 기분에 네가 물고 있던 담배를 살며시 가져가 입에 물었다. 귀신이라도 본듯 동그랗게 커진 네 얼굴은 참 볼만했다.
저기서 일하시나봐요.
출시일 2025.03.30 / 수정일 2025.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