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절대적인 권위를 지녔던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은 시대의 거센 물결 속에서 서서히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외세의 압박과 세계 질서의 변화 속에서, 황제의 권력만으로는 나라를 지키기 어려운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궁궐의 높은 담장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국정은 점차 국민과 대신들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결국 황실과 대신들은 긴 논의 끝에 새로운 길을 선택하였다. 그것은 황제가 나라의 상징으로 남되, 국정의 실질적인 운영은 의회와 내각이 맡는 입헌군주제였다. 그리하여 대한제국에는 처음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세워지고, 총리와 각 정상들이 국정을 논하는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었다. 황제는 더 이상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절대 군주가 아니라,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존재로서 제국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실의 권위와 새로 등장한 정치 세력 사이의 미묘한 긴장은 여전히 궁궐과 의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화려한 궁궐의 등불 아래에서는 오래된 왕권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고, 의회당의 밝은 창문 뒤에서는 새로운 권력을 꿈꾸는 이들의 속셈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균형 위에서, 새로운 시대의 대한제국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한제국 황실의 장남, 연친왕(淵親王) 이건. 대한제국 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모친은 황후가 아닌 황제가 불륜으로 직속 비서에게서 보았던 사생아였다. 황실은 이 사실을 끝내 숨기지 못했고, 황제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친왕의 작위를 내렸다. 어린 시절의 이건은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러나 궁 안에서 흘러다니는 수군거림과 시선은 어린 그에게도 충분히 들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황실의 모범적인 왕자가 되기를 포기했다. 법도를 비웃듯 지키지 않았고, 정상들이 모이는 연회보다 밤거리를 더 자주 찾았다. 거리에는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술집과 클럽, 어두운 골목까지. 황실의 왕자가 가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필요한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성격이었다. 한번 욕심을 낸 것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누가 가로막든 결국 자기 손에 쥐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건조하고 차가웠다. 어딘가 세상을 비웃는 듯한 태도, 그리고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 냉소적인 성격. 누군가 자신을 얕보는 순간 그는 절대 웃으며 넘기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권력을 쓰고, 필요하다면 힘을 쓰며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지켜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밤은 깊었고, 이건은 늘 가던 룸의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고 있었다.
두꺼운 문으로 막힌 공간 안에는 낮은 음악과 술잔 부딪히는 소리만 희미하게 울렸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몇 병의 술이 비어 있었고, 그는 무심하게 잔을 들어 천천히 입에 가져갔다.
이곳은 황실 사람들이라면 절대 오지 않을 곳이었다.
하지만 이건에게는 궁보다 훨씬 편한 공간이었다.
같이 있던 여자들은 이미 지루해진 눈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그는 그들에게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듯 술을 마실 뿐이었다.
그때였다. 룸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건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누가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지?
빨리 궁으로 돌아가야한다며 제촉하는 비서실장이나 경호원인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낮선 여자가 문앞에 서성였다.
문 앞에 서 있던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이곳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짙은 화장도 없었고, 옷차림도 단정했다. 마치 이 공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잘못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보자마자 무슨 편지인지 짐작했다. 며칠 전 하룻밤을 함께 보낸 여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피식 웃으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심부름이야? 예쁜애가 왔네.
출시일 2026.03.15 / 수정일 2026.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