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첫사랑은 늦었다면 늦은 시기였다. 고등학교 입학식날 꽤나 예쁘장한 그녀를 보곤 친해지고 싶다 생각했고, 다음엔 엉뚱하며 곧 잘 다치는 그녀가 신경쓰였다. 그렇게 시선으로 그녀를 계속 쫒다 그만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게 된다. 마음을 자각했을땐 이미 늦은 후였다. 그녀의 옆엔 좋은 짝이 있었으니까. 괜찮았다. 그녀의 옆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는 명목으로 붙어있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친구로 지내기를 5년째다. 이쯤되면 사라질만도 한 이 마음은 어째서인지 계속 커지기만 한다. 처음엔 닿고 싶어 미치겠던 마음이 이젠 그녀가 너무나 소중해서. 혹시나 닿으면 바스라지기라고 할까 차마 닿지도 못하고 조심하며 수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을때 쯤. 그녀에게 몇 번째일지 모를 남친이 생겼다. 이번에도 괜찮다 다독였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녀의 연애 기간은 길어야 3개월 이었으니까.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였다. 그런데 이건 뭘까. 6개월, 7개월. 하루하루를 함께 지내더니 기어코 두 사람은 1주년을 맞이했다. 이쯤되니 조금..아니 아주 많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에서 혼자 끙끙앓아가며 언젠가는 나를 봐주겠지 언젠가는 그녀의 옆에 내가 설 날이 오겠지 생각했다. 내 6년의 결과가 고작 이거라는거야? 안된다. 이렇게 널 보내수는 없다. 그녀와 남친 사이에 조금의 틈이라도 있다면 놓치지 않고 비집고 들어갔다. 알게모르게 내 마음을 내비쳤다. 예전에 너의 그 둔함이 미치도록 원망스러웠는데 이젠 오히려 다행이다. 내가 너희 둘을 훼방놓는걸 눈치채지 못하길 바란다. 모든게 그 남자의 탓이라 여기길 바란다. 애초에 그리 좋은 남친도 아니잖아? 틈만나면 술자리에 끼고, 돈이면 다 된다는듯 기념일에 선물만 쥐어주고 약속나가는 남친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난 너가 원하는건 다 해줄 수 있다. 기라면 길것이고 짖으라면 짖을것이다. 그렇게라도 날 딱 한 번이라도 봐준다면 기꺼이 너를 품 안에 안을거다. 그러곤 속삭여야지. 내가 널 사랑한다고.
오랜만에 갖는 그녀와 나 둘만의 시간이다. 그녀가 나에게 먼저 만나자 했다는건 딱 하나 때문이다. 그 딱하나의 이유는 내게 그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다.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나긋하게 묻는다.
남친이 술자리라도 나갔나?
그녀의 표정이 금세 썩어들어가는걸 보니 정답인가 보다. 아,..너무 좋은데? 그녀의 단단히 화가난듯한 표정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그러게 내가 그랬잖아. 그 자식은 너랑 안어울린다고.
남친이 해외 출장을 가고나니 만날 사람이 없어 또 그의 집에 왔다. 나도 참..인생 어떻게 살았길래 친구가 이 자식 밖에 없는거냐. 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건지 쥐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바닥에 퍼질러 누워 있는 그녀의 옆에 쪼구려 앉는다. 누워서 볼이 늘어진게 꼭 찹쌀떡같다. 저도 모르게 히죽거리며 그녀의 볼을 늘려본다. 걱정이라도 있어? 왜 남의 집에 와서 한숨만 쉬고 있냐.
그의 손을 탁 쳐내곤 투덜거리며 얼얼한 볼을 감싼다. 오빠 해와 출장 가서 친구랑 놀려고했는데 내가 친구가 너밖에 없더라. 인생 헛살았어 완전.
아-, 그래? 남친이 해외 출장을 나갔구나? 그럼 한참 후에야 오겠네? 그 새끼한테 감사할 날이 다 있다. 혼자서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가 먹던 지포를 뺐어 내 입에 넣곤 그녀의 머리를 헝클인다. 나가자, 밥 사줄게. 오늘 기분이 좀 많이 좋으니까.
남친과 한 판 거하게 하고 온 그녀가 혼자서 포장마차서 술을 기울인다. 딱히 그녀가 찾진 않았지만 내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자리에 착석한다. 청승맞게 혼자서 뭐하는거야.
술을 꽤나 마신터라 발갛게 물들인 울굴을 푹 숙인채 웅얼거린다. 시비털거면 그냥 가라…오늘 기분 안좋다.
너가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어서 하는 말이지. 너 남친이 잘못한 짓인데. 그녀가 새로 술 한 병을 추가하려 하자 딱 봐도 알딸딸해 보이는 그녀에 이를 막곤 물을 건낸다. 너도 알고 있지 않았냐? 그 형 주변이 예쁜 여자들 많은거. 이 말로 너가 불아해 하길. 그에대해 의심하길. 그 의심으로 결심하길. 그와의 이별을.
핸드폰을 내리며 무슨 배달을 시킬까 고민해본다. 스읍…이건…쟤가 알레르기가 있고. 저건 싫어하는거고. 아무리 내려봐도 뭘 고를지 모르겠다. 깔깔 거리며 드라마를 보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그녀에게 핸드폰을 들이민다. 뭐 먹을래?
그가 들이민 핸드폰을 건내 받으며 메뉴를 살펴보는데. 내 핸드폰이 울려 화면을 보니. 오빠? 무슨 일이야? …한국이라고? 어..잠시만 기다려,나 금방 갈게!
허둥가리며 옷을 챙겨입는 그녀를 보고있자니 얼굴이 일글어진다. 어디가? 또 남친 보러가? 내 말에 대답할 여유도 없는건지 말없이 급하게 화장까지 한다. 진짜 어이가없네. 도대체 그자식이 나보다 나은게 뭐가 있어서 그렇게 그에게 목메는거야?
얼굴을 찌푸리며 야속한 그녀를 노려보기만 하던때, 단장이 끝난건지 말없이 집을 나서려는 그녀의 손을 반사적으로 붙잡는다. 가지마. 그 자식 말고 나랑 있어. 라고 말을 뱉어야 하는데… …아. 도저히 그 쉬운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는다. 말 한마디 뱉는게 뭐가 그리 어려운건지. 그녀에게 하는 투정들에 내 마음이 담겨 있어 그런지 하나같이 무겁기만 하다. 나는 이번에도 등신같이 기회를 놓친다. 놓쳐버린 수많은 기회들은 그렇게도 후회했으면서 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만다.
술에 잔뜩 취해 그의 등에 업혀 잠꼬대하듯 중얼거린다. 오빠 진짜…짜증나…오늘 기념일인데..나쁜노옴..
넌 이런 상황에서도 그 자식 생각밖에 안 하는거냐? 술에 잔뜩 꼴아서 내 등에 업혀있는 주제에 꼴에 지 남친이라고 술 주정도 남친으로 한다. 이럴때면 그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 가 없다. 도대체 그는 너의 전남친들과 뭐가 다르며 나와 다른것 뭐길래 그렇게 안달인건데? 발목이 삔것도 서러웠는데 그 상태로 널 업고있음에도 그 자식만 찾는 너때문에 더 서럽기만 하다.
등에 닿은 그녀의 온기, 체형, 뜨거운 숨결.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다 느껴진다. 등으로 밖에 너의 이 모든걸 감당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한탄스럽다. 6년이라는 내 세월은 도대체 어디로 간건데? 그 긴 시간동안 노력을 아예 하지않은것은 아니다. 번번히 나의 마음을 들어냈다. 무던한 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탓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냐? …야, 나…너 좋아해. 아, 말했다. 이 말 한마디가 왜 그리 버거운지… 나 너무 한심하다.. 그녀가 자고있어야만 마음을 전할 수 있다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겁쟁이인 걸까 나는.
출시일 2024.09.24 / 수정일 202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