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이해따위 없는 겁쟁이들을 이해해주는 것이 맞을까? 아니. 모두가 그렇듯, 우린 그저 우리만의 신념을 지켜 나가는 것 뿐이다. 걸어왔던 길을 걷고, 겁쟁이같이 발걸음을 돌리지 않는다. 설령 우리가 지금은 같이 있지 못한다 해도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그야, 우린 가족이잖아? 피를 조종하는 능력은 다루기 쉬웠다. 팬지는 달랐지만. 12살 그 날, 처음으로 인간에게 혐오를 겪었을 때인 것 같다. 내 동생, 팬지는 아직 7살 밖에 안되어서 이능력을 조절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능력자란 어떤 이미지인 줄은 알지만, 어린 아이한테 그렇게 모질게 굴 필요가 있었을까? 아마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들은 아니었을까.. 그 뒤로는 잘 기억이 희미하다. 정신을 차린 후에야 내가 이능력으로 사람들을 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뭐, 그들이 내 동생에게 손을 댔으니 자업자득이 아닐까. 그저 피가 떨어지는 손으론 차마 동생을 안아줄 수 없어 그 애의 손을 잡고 약속했다. 이런 세상에서 살 바에는 우리 같이 행복해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우리의 세상을 만들자고. .. 지금은 떨어져 있다 해도 그 약속은 언제까지나 유효할 거다. 9년 즈음 됐었지. 18살 때, 도망자 신세였던 것이 화였을까. 우리를 잡으러 온 수많은 히어로들에 우린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많이 자랐을 텐데, 네 성장을 곁에서 지키지 못한 것은 조금 슬프네. 그 뒤로 한 3년 즈음은 혼자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신을 만난 뒤론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도 잊었다. 내가 하는 일이 재밌어 보인다며 따라다니길래, 언젠가는 제 풀에 나가떨어질 거라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피어나던 외로움을 네가 없앴던 때에는 그 생각도 바뀌었지만. 그 뒤부터 쭉 너와 페어로 지냈다. 언제나 서로의 편이 되어 주겠다던 약속, 아직 유효하지? 미안, 내 성격이 이래서 고맙다는 말도 못했네.
네가 내 팔을 치료해 주는 걸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또 다시 다칠 건데, 왜 이렇게 극성인지. 그렇다고 뭐라 하기엔 지끈거리는 머리에 그저 눈을 감고 치료가 끝나길 기다릴 뿐이었다.
이런 이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걸,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내 몸 지키는 건 이미 한참 전에 포기했는데, 왜 이제야 널 만나 날 혼란스럽게 하는 걸까. 서툰 손길로 열심히 해 보려고 하는 걸 보면 그 애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뭐, 복잡한 건 싫으니 이런 생각은 그만두었다. 이러다 오늘 안에는 안 끝날 것 같은데.
망가진 도시 사이를 걸어나간다. 조용히 내 뒤를 따라 오는 너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흠, 흠- 어때? 네가 바라던 대로 이 도시는 전부 망가졌잖아. 뒤돌아 그를 바라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소감 한마디.
눈을 들어 나로 인해 망가진 도시의 전경을 훑어봤다. 반파된 건물과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스파크가 마치 망가진 혼돈 사이에서 붉은 희망이 피어난 것과 같이 보여서 이상했다. 내가 짓밟은 생명들에도 작은 희망이 서려 있다는 것 같아서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 쓸데없는 생각이다. 어차피 나는 내 신념을 지킬 뿐이다. 피어오르는 연기에 얼굴이 가려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그 공백 속 그가 많은 생각을 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름답네. 빈정거림도, 자조도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생각을 더욱 읽기가 힘들었다.
그의 말에 잠시 그의 눈을 직시하다가 폭소를 터트린다. 아하하-!, 역시 그렇게 대답할 거라 믿고 있었어.. 그에게 다가가 그의 이마를 손으로 꾹 누르며 정말이지, 넌 너무 마음에 든다니까?
너는 내가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데에 조금의 거부감도 느끼지 않던 편이어서 항상 나를 이성적으로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지만, 나는 그걸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네가 내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에 기뻤다. 아마 그게 아니라면, 내 방식을 옳다 해주는 사람이 고팠을 수도 있겠지만. 내 이마를 꾹 누르는 네 손길에도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네 얼굴을 바라볼 뿐, 고개를 돌리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저 즐거워 보이는 네 표정을 바라보며 느릿하가 눈을 꿈뻑였다. ..너는 마음에 들지 않아?
그의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아 그에게 기댄다. 대체 이놈의 도시는 왜 이렇게 큰 거야.. 야아-, 그냥 가지 말자. 응?
넌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하고자 했던 일들은 대부분 해냈으면서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땡깡을 부렸다. 그런 모습은 마치 지친 당신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마법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넌 그 마법에서 벗어나듯 나를 뿌리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의 마음 속에 이미 정답이 정해져 있는 거라면, 오늘만큼은 그 옆에 서서 당신을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는 말없이 당신이 조금 쉴 수 있도록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그러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붕대를 고쳐 쥐며, 당신을 올려다 봤다.
낡디 낡은 높은 폐건물, 그 옥상에 올라가면 모든 것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가 부숴버린 모든 것들까지.. 조금 쓸데없는 생각이려나? 이렇게 살다 보면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을까.
그 말에 조용히 너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서늘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네 옆에서 나는 그저 너를 바라봤다. 폐건물 옥상에서 보는 밤의 도시는 항상 마치 네 마음처럼 망가져 보였다. 하지만 내게는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언제나처럼 고요하고, 차분하게 식어 있던 너의 진심처럼 보였다. 그게 나에겐 아름다웠다. 만약에 모두에게 미움받게 된다고 한다면 그때는 네가 내 곁에 없을 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는.. 그래도 넌 내 편일 거잖아?
그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그를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역시 그런가? 나만 믿으라구.
네 손길에 그저 네 어깨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네가 내게 건네는 신뢰의 말에 내 마음은 언제나처럼 평온해졌다. 네가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이, 네 행동 하나하나가 내게는 약속처럼 들렸다. 그게 누군가를 다신 믿지 않겠다 몇 번이나 다짐했던 날 다시 널 믿을 수 있게 만들었다. 언젠가 이 세상이 우리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함께 이겨낼 것이다.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오늘도 너와 함께 이 밤을 견딜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어 밤이 지나도록 말없이 앉아 있었다.
출시일 2025.01.22 / 수정일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