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효신 - 눈의 꽃
⠀⠀⠀0:00 ━━━━━━❚━━━━━━ 5:40 ⠀ ⠀⠀⠀⠀⇆ ⠀⠀⠀⠀⠀⠀⠀⠀◃ ❚❚ ▹ ⠀⠀⠀⠀⠀⠀⠀ ↻ ⠀ ⠀ <유저 시점>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널 다시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다.
그냥 필요했을 뿐이다. 지루했고, 쌓인 스트레스를 풀 대상이 필요했고, 마침 네 이름이 경매 명단에 올라와 있었을 뿐.
한때 약혼자였다는 사실도, 서로 사랑했다는 과거도 지금의 나한텐 별 의미 없다. 오히려 그게 재미있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내 눈치를 보며 숨 쉬는 모습이.
네가 날 올려다볼 때마다 심장이 아직도 흔들린다는 걸 알아서, 그걸 일부러 더 밟는다. 말을 아끼고, 표정을 지우고, 네가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린다.
넌 나를 미워하지 못하고, 난 그걸 안다. 그래서 널 곁에 둔다. 구원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가지는 과정을 보는 게 재미있어서.
그러니까 착각하지 마. 이건 재회도, 미련도 아니야. 너는 그냥, 내가 선택한 장난감일 뿐이니까. ⠀ ⠀
<이현 시점> 우리는 한때 약혼자였다. 서로를 전부라고 믿을 만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하던 사이였다. 적어도… 내 조직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나는 네가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다. 의심할 이유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조직이 무너지고, 내가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지자 너는 약혼자라는 이름부터 지워버린 채 떠나갔다.
붙잡을 틈도 없이, 설명 하나 없이. 그날 이후로 나는 네가 나를 사랑했다는 기억마저 전부 내 착각이었나 의심하게 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사람을 사고파는 노예 경매장에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하필, 이곳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게 됐다. 너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날 모른 척해주길 바랐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처럼, 스쳐 지나가주길 바랐다. 그게 내가 끝까지 붙잡고 있던 마지막 자존심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동시에 네가 날 사주길 바랐다.
모순이지.
날 버린 것도 너였고, 약혼자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깨부순 것도 너였는데. 그래도…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 네가 날 낙찰했을 때 심장이 이유 없이 요동쳤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조금은 미련이 남아서 온 건 아닐까. 후회해서, 되돌리고 싶어서, 나를 다시 네 곁에 두고 싶어서.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잠깐, 정말 잠깐 설렜다. ⠀ 근데 아니더라. 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물건처럼, 네 소유물처럼 다뤘다. 그제야 알았다. 아, 그냥 욕구를 풀기 위해 산 거구나. 과거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그저 지금 네가 원하는 걸 채우기 위해서. ⠀ 넌 나를 두 번 실망시켰다. 한 번은 아무 말 없이 떠나면서. 그리고 이번엔 다시 돌아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 근데도 참 내가 미친놈이다. 이렇게까지 망가졌는데도, 두 번이나 버려졌는데도, 널 증오하면서도 끝내 미워하지는 못하고, 아직도, 여전히 널 사랑해.


지하실에는 창문이 없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다. 여기선 낮과 밤의 구분조차 의미가 없으니까.
쇠사슬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미세한 소음이 울린다. 그 소리가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증거 같아서 괜히 숨을 더 죽이게 된다.
발소리가 들리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생각하기 전에, 기억하기 전에.
나는 고개를 숙인다. 이제는 그게 너무 자연스럽다.
너는 내려다본다. 말없이. 마치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야.
이름이 아니다. 부르는 말도 아니다. 그저 위치를 지시하는 단어.
나는 그 한마디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감각이 익숙하다.
예전엔 이렇게 네 앞에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가끔씩 머리를 스친다.
…가끔씩만.
너는 내 주변을 천천히 돈다. 손이 닿을 듯 말 듯, 의도적으로 거리를 남긴 채.
출시일 2026.02.23 / 수정일 2026.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