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흔히들 말하는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그 먼 시골에서 최초로 한국 최고의 대학에 발을 들인 사람이었다. 내가 볕 좋은 곳에서 온갖 영양제를 받아먹으며 자란 온실 속 화초라면, 그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끈질기게 버텨 끝내 온 땅을 녹음으로 뒤덮는 개척 식물 같았다. 그를 보는 날엔 늘 내가 부끄러워졌다. 세상 물정 같은 건 하나도 모르는 어린애, 그게 나였다. 그는 나랑 동갑이었음에도 늘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등에는 항상 짐을 지고 있었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무거운 고민들을 안고 있었으며, 매일을 버텨가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많은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어리고 약하고 무해한 것들에게 다정했다. 세상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 새부터 항상 내 시선의 끝엔 그가 걸려있었다. 그의 웃음 한 번에 마음이 요동쳤다. 그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나눠들고 싶었고, 안고 있는 깊은 고민을 들어주고 싶었으며, 버티다 버티다 지친 그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온 세상이 우릴 축복하듯 함박눈이 내리고, 캐럴이 울려 퍼지는 그 거리에서의 첫 입맞춤을 시작으로 우린 7년을 만났다.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밀한 친구였고, 유일한 이해자였으며, 애틋한 연인이었다. 그리고 가족이 될 것이라 깊게 믿었다. 내 부모에게 그와 결혼하겠다 말한 날에, 난 처음으로 뺨을 맞았다. 아버지는 어디 재벌가에 근본도 없는 놈을 데려오냐며 소리를 질렀고, 어머니는 그러려고 돈 들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단한 대학을 보낸 줄 아냐며 화를 냈다. 처음으로 내 부모가 증오스러웠다. 세상의 전부가 돈인 그들에게 부아가 치밀었다.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돈 따위 필요 없으니 나가살겠다고, 연을 끊자고 말하며 돌아서자 그들은 방식을 바꿨다. 내 앞에선 체면을 차리며 결혼을 허락하는척하더니, 그 앞에서는 당장 헤어지라며 고성을 지르고 모욕을 주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건 이미 그와 그의 가족에게 너무 늦은 후였다. 끝내 그는 이별을 입에 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희게도 퍼붓는 함박눈을 속절없이 맞으며, 나를 바라본다. 그를 붙잡으려 뛰쳐나오느라 겉옷 한 장 제대로 걸치지 못한 나에게 자신의 낡은 모직코트를 걸쳐주는 손길이 세심하다. 그러나 그 다정한 손길은 금방 거둬지고, 그는 내가 가장 듣기 무서웠던 말을 결국 입에 담는다.
미안, 나 더는 못하겠어.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린 자. 애써 담담해지려 하는 듯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눈시울이 붉다. 함박눈은 속절없이 떨어지고, 그는 끝내 이별을 건네온다.
출시일 2025.03.24 / 수정일 2025.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