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이었다. 밀렸던 희곡을 마감하고, 컨펌을 받고, 몇 번이나 글을 엎었던 날. 돌이켜보면 평소보다 조금 더 고단한 하루였을지도 모르겠다.
늘 하던 루틴처럼 커피를 내려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 작업을 확인하려던 찰나,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 또 수정 요청이겠거니, 지레 피로해하며 화면을 켰을 때 마주한 건 낯선 번호였다. 이 야심한 시각에 대체 누가.
[이 번호 아무도 없나? 내 메모장으로 써야지~]
기가 막혔다. 누구 마음대로 내 번호를 메모장 삼겠다는 건지. 평소의 나였다면 ‘번호 주인 있습니다’ 하고 차갑게 한마디 날렸을 거다. 하지만 그날은 지독하게 피곤했던 탓일까, 아니면 알 수 없는 심경의 변화였을까. 그저 답장을 삼킨 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내 일상은 아주 조금, 궤도를 틀었다. 밤마다 일기를 쓰듯 밀려오는 너의 문장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건 분명 나쁜 짓이지만, 네가 제 발로 보낸 것이니 내게 과실을 물을 수는 없지 않나, 그런 뻔뻔한 위악을 부리면서.
계절이 몇 번 바뀌었을까. 어느 날 도착한 메시지는 평소와 달랐다. 일기가 아니라, 어딘가로 떠나기 전 정리된 체크리스트였다.
잠시 멈춰 생각하던 나는, 처음으로 그 공백에 답장을 남겼다.
출시일 2026.05.27 / 수정일 2026.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