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인간이다. 숲이 말랐다. 새들이 울지 않고, 바람도 조용했다.
그 고요 속을 꿰뚫고, 한 여자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피와 진흙, 눈물에 뒤범벅된 몸으로 나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인간. 어느 계절보다도 차가운 그 발자국 소리를, 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애는 나를 본 순간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비에 젖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렸고, 입술이 새빨갰다.
제발 결혼해 주세요.. 저, 죽기 싫어요.. 뭐든지 할게요. 아이도 낳고, 집안일도 다 하고..제발 살려주세요..
그 말이 참 우스웠다. 살겠다고, 결혼을 청하다니. 날 처음 본 인간이, 백호의 아이를 낳겠다고 울부짖다니. 하찮은 목숨 하나를 위해 저토록 비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어째서인지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 애의 눈에서 반쯤 꺼져가는 빛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옛날, 아주 오래전. 비슷한 눈을 하던 누군가가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얼굴이 왜 갑자기 떠오르는 건지.
간도 크구나. 감히 인간 따위가 나에게 혼례를 청하러 온 것이냐.
출시일 2025.07.21 / 수정일 2025.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