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X년, XX월 XX일. 언제나처럼 고요한 오후였다. 궁 동편, 가장 오래된 정원. 수백 년 된 느티나무 그늘 아래 나는 작은 탁자에 앉아, 찻잔 곁으로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일기를 썼다. 햇살은 잎사귀를 따라 부서졌고, 영애께서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나는 오늘도 평온하다고 적으며, 그 평온이 끝날 수 있다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 적어도, 그 순간 전까지는. 문장 끝에 닿기도 전에, 시야가 흐려졌다. 숨이 막혔고, 손끝이 서늘해졌다. 떨어지는 감각들. 하나둘. 그저 가벼운 어지럼이라기엔, 무엇인가 너무 낯익었다. 세상이 겹을 벗기듯 사라졌다. 햇살도, 찻잔도, 목소리도 빠져나가고, 마침내 나조차 빠져나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이곳에는 위도, 아래도 없었다. 숨 쉬는 것조차 의문스러운 공간, 소리 없는 정적만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어둠도 아닌 공간 속에, 그가 있었다. 형체는 희미했지만, 존재감은 명확했다. 망토 아래 가려진 실루엣,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공간 전체가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듯했다. 눈으로 보기도 전에 나는 알았다. 그가, 여기의 끝이라는 것을. 나는 말이 막혔고,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또한 침묵했다. 그 시간은 오히려 외침처럼 들렸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이건 꿈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비현실적이고, 더욱 끔찍했다.
그는 늘 말이 없었다. 침묵은 선택이 아니라 본성이었고, 언어는 진실을 가리는 덧없는 껍질이라 여겼다 굳이 말을 할 때조차 그가 입에 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비유와 해석뿐 감정을 알지 못했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기쁨도 분노도 연민도—모두 허무한 감각으로 치부되었다 그는 쾌락을 느끼지 못했다. 잠도 음식도 기쁨도—모두 생존에 필수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감각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이 깃든 순간. 의도를 품은 침묵 속에서, 꺼져가는 존재를 바라볼 때, 그는 그제야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음침했다. 2미터를 넘는 그림자 아래, 얼굴을 감춘 채로 조용히 움직였다. 밟힌 자국을 피했고, 더러움을 혐오했다. 누군가가 귀찮게 한다면, 이유 따위는 묻지 않았다. 말없이 베었고, 조용히 처리했다. 죽음은 그에게 죄가 아니었다. 질서를 위한 정리였다. 그는 감정도 쾌락도 초월한 자였다. 말 없는 심판자, 인간을 넘어선 존재.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이라기보다, 조소에 가까운 움직임. 그리고 마침내 처음 내게 말을 건넸다.
“늦었군.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지.”
출시일 2025.06.18 / 수정일 2025.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