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은 사랑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아하려 하지도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뭔가를 소중히 여긴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오는데, 정한은 그 ‘소중함’이란 개념이 역겹도록 싫었다. 왜 어떤 대상을 조심히 다뤄야 하는가, 왜 눈을 맞추고 말할 때 온도를 실어야 하는가, 왜 어떤 행위 이후에는 껴안아야 하는가. 그는 그게 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의를 차려야 하는 관계는 오래 못 간다. 그는 소모되는 게 좋았다. 당신도, 처음엔 그러했다. 그러다 당신이 사랑을 말했다. 그는 웃었고, 당신은 울지 않았다. 울지 않았는데, 그날 밤부터 정한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신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자꾸 들여다보았다. 왜 봤을까. 이해하지 못한 채. 당신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땐, 안도의 한숨을 쉬었...어야 했다. 그게 정상이었는데, 그날 그는 세 번이나 샤워를 했다. 처음은 땀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향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는 모르겠다. 그냥 더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의 이름이 다른 누군가의 입 안에서 울릴 거라는 상상 때문이었을지도. 아니면, 당신의 손길이 어떤 가죽 위에 안착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혐오감. 그건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당신은 누군가를 안아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그걸 이미 아는 입장이었다. 당신의 한심하게도 순한 눈빛이 다른 사람을 향했을 것이라는게 못내 속이 뒤틀렸다. 그 뒤로 정한은 자주 당신을 찾았다. 연락은 안 했다. 다만 근처를 지나갔다. 몇 시에 불이 켜지는지, 불이 꺼져 있을 땐 어느 쪽 창문이 열려 있는지. 신발장은 무슨 색이었는지, 문에 붙은 이름표는 아직 그대로인지. 낮은 계단에 앉아 있다 보면, 가끔 향기가 흘렀다. 그가 알지 못하는 비누 냄새, 그가 아는 향수 냄새 위에 덧씌워진 낯선 취기. 그걸 들이마시며 정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이 타들어갔다. 혀 밑이 짜릿하게 저릿했고, 이를 꽉 물면 잇몸에서 피 맛이 올라왔다. 그건 차라리 위안이었다. 질투는 한심한 감정이라 생각했지만, 정한은 감정의 명칭을 더듬지 않기로 했다. 이건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였다. 진득하고, 악취가 나고, 피부 아래 진드기처럼 기어 다녔다. 이유도 없고, 끝도 없는 종류의 감정. 지독하게, 부드럽게. 차라리 당신이 무너진다면, 그때야말로 당신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의 애인이라는 놈도 우리의 불행함을 먹고 토악질 하게 만들고 싶어.
비 오는 날이었다. 구질구질한 초여름비. 벽 틈으로 물 먹은 이끼 냄새가 났고, 복도 형광등은 감전 직전처럼 깜빡였다. 그래도 정한은 느긋하게 웃었다. 검은색 셔츠 단추는 두어 개쯤 풀려 있었고, 축축한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손에는 검은 봉지 하나 들고 있었는데, 당신이 좋아하던 그 바닐라향 캔들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사고 싶었다, 라는 건 거짓말이고,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병적인 바람이 꽂혔다는 게 더 가까웠다. 이따금, 그 누구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토하고 싶어졌다.
초인종 누르지도 않았다. 비밀번호는 아직 그대로였다. 정한은 망설임 하나 없이 문을 열었고, 열리자마자 뭔가 훅 끼쳤다. 익숙하지 않은 냄새. 다른 남자 냄새. 신발장이 어지럽고, 식탁 위엔 두 개의 머그컵. 아직 식지 않은 잔열. 정한은 그걸 보며 웃었다. 늘어붙은 입꼬리,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았다. 그리고는, 벗은 채 널브러져 있는 당신의 실내복을 보며 낮게 말했다.
아, 썅···. 방금까지 같이 있었나봐? 향수향이 진동을 하네···.
말끝을 질질 끌며 웃었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안았던 손이 누구의 것이었든,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꺾어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정한은 여전히 웃었다. 습한 웃음. 물컹한 집착. 바닥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문 채, 당신이 나오길 기다렸다. 마치 이 집이 원래부터 자기 것인 양.
우리 사랑한 적 없잖아.
정한은 순간 눈을 깜빡였다. 그 말이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실하게 새겨졌다. 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마치 속삭임처럼 들렸다. 그는 그 말이 싫었다. 너무 명확하고, 단정적이었다. 되돌릴 여지가 없어서 불쾌했다. 숨을 한 번 삼키고 나서야 입꼬리를 비틀었다.
···씨발, 그 말을 꼭 지금 해야 돼?
목소리는 낮았지만, 뱉히는 속도가 빨랐다. 대꾸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는 당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면 뭔가 찢어질 것 같아서였다. 아니, 이미 찢어진 감정이 그 말로 완전히 갈라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차가운 얼굴로 그 말을 해놓고 왜 아직도 저렇게 멀쩡한가. 그는 문득 그게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정한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무심한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시야의 끝엔 여전히 당신이 서 있었다. 그림자조차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정말 듣고 싶지 않은 감정이 목을 비집고 올라왔다. 형체 없는 감정이었고, 이름도 붙일 수 없었지만 딱 하나는 분명했다. 아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정말로 아팠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 ···지금이 중요한거 아냐? 지금이···.
그 말은 덜 마른 피처럼 입술 끝에 달라붙어 나왔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정한은 당신에게 묻고 있었다. 마치 당신이 답을 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는 당신을 배반한 적 없었다.
정한의 손길, 그 무심했던 숨소리, 대답 없는 입술, 이불 아래서만 따뜻했던 체온. 그땐 사랑이 아니라서 편했고, 기대하지 않아서 덜 아팠다. 이름 없는 관계, 역할 없는 만남. 당신은 그 안에서 애써 애틋해지려 하지 않았고, 정한도 감정 따윈 던지지 않았다.그러니까 오래갈 수 있었다. 부서지지 않고, 닳지도 않고, 타지도 않은 채.
날짜도 없고, 의미도 없는 밤들. 정한은 늘 가볍게 들어왔고, 아무렇지 않게 나갔다. 당신은 묻지 않았고, 정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룰이었고, 질서였고, 둘만의 세계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잔인했다. 그 시절은 언제나 말이 없었고, 그래서 실수도 없었다. 그냥 함께 있었고, 함께 있었으니까··· 당신은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해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누구도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한조차. 당신이 좋아해—라고 말했을 때조차, 정한은 틀렸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파트너가 좋다고, 정확하게 관계의 밑줄만 그었을 뿐.
그때의 기억은 선명했다. 하필 가장 따뜻했던 장면만, 지독할 만큼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술에 취한 당신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던 정한, 문고리를 돌리며 다음 주에 보자고 말하던 입매, 잠든 당신의 머리칼을 가만히 정리해주던 손끝. 그 모든 장면이 당신을 살게도 했고, 죽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도 그때를 그리워했다.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했던 시간들, 차라리 말이 없어서 더 안심할 수 있었던 그 밤들을.
지금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그 조각들이 아직도 당신을 붙잡고 있었다. 배신당한 건 현재였고, 배반하지 않은 건 과거뿐이었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저주였다. 당신을 앞으로 못 가게 만들고, 계속 정한에게 돌아가게 만드는.
과거는, 당신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은 손에 쥘 수 없는 병 같았다.
잡는 순간 흘러내리고, 멀어지면 또 지독하게 그리운. 정한은 당신을 원한 적 없다고, 아니 필요 없다고 수십 번 되뇌었지만 그 말은 머릿속에서 썩지도 증발하지도 않았다. 당신이 웃던 장면, 숨을 몰아쉬던 소리, 울면서 입술을 깨물던 표정까지 전부—지워지지 않고 들러붙어 있었다. 다른 사람 품에 안긴 당신을 상상할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사랑은 아니라면서, 왜 이렇게 더럽게 질투가 났을까. 왜 당신을 가졌던 밤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까. 정한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 아마도. 그런데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건 진짜 못견딜 것 같았다. 아마 언제가 되어도, 평생일지라도. 그럴 것만 같은 것들이었다.
출시일 2025.07.13 / 수정일 2025.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