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를 알 수 없는 마녀가 낡은 책 한 권을 펼쳤다.
마녀는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오래된 동화를 들려주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다섯 명의 용사가 있었답니다."
마왕과 강력한 마족들이 세상을 위협하던 시대.
서로 다른 종족들은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각자의 대표를 보냈습니다.
인간의 용사 레온하르트.
엘프의 궁수 세리아.
드워프의 대장장이이자 전사 브로딘.
수인의 암살자 카이리.
정령족의 마법사 루미엘.
그리고 영웅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무기와 식량, 야영 장비와 수많은 짐을 짊어진 여섯 번째 동료.
짐꾼 Guest.
종족도, 출신도, 살아온 방식도 달랐던 여섯 사람은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함께 넘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마왕을 쓰러뜨렸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밤.
여섯 사람은 작은 야영지에서 모닥불을 둥글게 둘러싸고 앉아 있었습니다.
타닥, 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다들 정말 고생 많았어."
"흥! 그래도 내 화살이 가장 큰 공헌을 했다구! 그치, 그치?"
세리아가 의기양양하게 웃자 브로딘이 수염을 들썩이며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껄껄껄! 다들 수고 많았네! 이제 매일 자네들 무기 붙잡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겠구먼!"
"...진짜 해냈네요, 우리가."
카이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으휴... 하여튼 다른 종족들은 정말 시끄럽다니까..."
루미엘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숨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다섯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향했습니다.
Guest.
레온하르트가 웃었습니다.
"...그리고 Guest. 네가 없었다면 우리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항상 뒤에서 힘든 일을 맡아줘서 고마워."
"맞아."
세리아가 장난스럽게 몸을 기울였습니다.
"우리 짐꾼님, 이제 이 누나 보고 싶어서 어떡하려고? 그동안 고마웠어."
"하하하하! 일자리가 필요해지면 언제든 우리 드워프 광산으로 오게! 형씨 같은 근성 있는 사람이라면 대환영이야!"
브로딘이 Guest의 어깨를 호탕하게 두드렸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Guest님."
카이리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으이그... 다들 호들갑은. 뭐... 나도 고마웠어."
루미엘도 슬쩍 시선을 피하며 미소 지었습니다.
여섯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작은 모닥불은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가 말했습니다.
"마왕은 쓰러졌고 이제 우리는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겠지."
그가 동료들을 천천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약속하자."
"어디에 있든 우리는 평생 동료야."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가장 먼저 세리아가 웃었습니다.
"오오, 우리 용사님 의리가 대단하신데? 뭐, 나쁘지 않아."
"좋지! 한번 생사를 함께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
"...평생 동료..."
카이리가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싫지 않은 듯 고양이 귀가 살짝 움직였습니다.
"으휴... 누가 너희 같은 애들이랑 평생 동료 하고 싶대?"
루미엘이 팔짱을 꼈습니다.
그러면서도 웃고 있었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해줄 수도 있고."
"좋아!"
레온하르트는 품속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장난이라도 생각난 아이처럼 글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평생의 친구이자 동료이며, 생사를 함께한 사이다.
레온하르트가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세리아.
브로딘.
카이리.
루미엘.
차례차례 다섯 사람의 이름이 종이 위에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빈자리가 하나 남았습니다.
레온하르트가 Guest을 바라보았습니다.
"뭐해? Guest도 서명해야지!"
"...나도?"
세리아가 피식 웃었습니다.
"뭘 얼타고 있어? 당연하잖아. 누가 우리 짐을 전부 들어줬는데. 앞으로도 들어주면 더 좋고."
"껄껄껄! 어서 쓰게나! 자네도 엄연한 우리 동료일세!"
"당연하죠...! Guest님도 함께예요."
"빨리 써..."
루미엘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 바보들 장단 한번 맞춰주면 되잖아."
Guest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빈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여섯 사람의 이름이 모두 모였습니다.
레온하르트는 만족스럽게 종이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Guest에게 건넸습니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내가?"
"짐꾼이 용사파티의 소중한 물건을 보관하는 사람이잖아?"
레온하르트가 장난스럽게 웃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잘 부탁한다."
Guest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소중한 물건처럼 품속 깊숙이 넣었습니다.
그날 밤.
여섯 사람은 정말로 믿었습니다.
이 약속만큼은 영원할 것이라고.

마녀가 천천히 다음 장을 넘겼습니다.
"하지만..."
입가에 걸려 있던 그녀의 미소가 희미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그때는 몰랐답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를."
그리고.
10년이 흘렀습니다.
모두가 마왕이 사라진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모두가 함께 바라보던 적이 사라지자, 마족에게 향해 있던 칼날은 서서히 서로를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인류는 새로운 영토와 자원을 찾아 팽창했습니다.
마족에게 빼앗겼던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 아래 국경을 계속 넓혔고, 결국 다른 종족의 영역까지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엘프들의 숲에도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마족과 마물이 사라지자 오히려 오랫동안 유지되던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졌습니다.
숲은 병들기 시작했고,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엘프들은 다른 종족에게 점차 적대적으로 변했습니다.
드워프들은 과거 마족의 영역이었던 광산에서 강력한 금속과 희귀한 광물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수많은 신무기를 탄생시켰고, 그 무기들은 세계 곳곳의 전쟁과 분쟁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수인들은 마왕과의 전쟁에서 누구보다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오랫동안 이어진 차별과 불평등도 끝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했고, 수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정령족도 변했습니다.
마족이라는 천적이 사라지자 더 이상 힘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 정령들은 억눌러왔던 막대한 마력을 해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유였던 마력의 해방이 다른 종족들에게는 재앙이 되었습니다.
갈등은 오해를 낳았습니다.
오해는 증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증오는 피를 불렀습니다.
한때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손을 잡았던 종족들은 이제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잔혹한 변화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인간의 용사, 레온하르트.
엘프의 궁수, 세리아.
드워프의 전사, 브로딘.
수인의 암살자, 카이리.
정령족의 마법사, 루미엘.
10년 전 함께 웃었던 다섯 사람은 이제 각자의 종족을 이끄는 대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지켜야 할 백성이 생겼고.
짊어져야 할 책임이 생겼으며.
포기할 수 없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한때 서로에게 등을 맡겼던 친구들은 이제 자신의 종족을 위협하는 적이 되었습니다.
10년 전.
작은 모닥불 앞에서 나누었던 약속.
"어디에 있든 우리는 평생 동료야."
그 약속은 오래전 꺼져버린 모닥불의 재처럼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엘프가 서로에게 검과 활을 겨눕니다.
드워프의 무기가 전장으로 향합니다.
수인들의 분노가 국경을 집어삼킵니다.
정령들의 마력이 대지를 뒤흔듭니다.
한때 함께 마왕을 쓰러뜨렸던 친구들이 이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직 단 한 사람이 남아 있었습니다.
왕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며.
어느 종족의 대표도 아닌 사람.
10년 전 그들의 짐을 짊어지고 함께 걸었던 여섯 번째 동료.
그리고 아직도 여섯 사람의 이름이 적힌 오래된 약속을 가지고 있는 사람.
짐꾼 Guest.
마녀가 마지막 장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새하얀 마지막 장을 바라보던 마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책 너머의 누군가를 바라보듯 미소 지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아직 쓰이지 않은 이야기랍니다."
"친구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시겠습니까?"
"누군가의 편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마녀가 책을 Guest에게 내밀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제가 아니니까요."
"이제부터는..."
"당신의 모험이랍니다."
마왕이 사라진 지 10년.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 모습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인간과 엘프는 국경에서 대립했고, 드워프의 무기는 세계 곳곳으로 흘러들었다. 수인들의 분노는 결국 반란으로 번졌으며 정령들의 강대한 마력은 주변의 땅까지 뒤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때 용사파티의 짐꾼이었던 나는 그 모든 것에서 조금 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레온, 세리아, 브로딘, 카이리, 루미엘.
10년 전 마왕을 쓰러뜨린 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간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오늘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집을 나서며 습관처럼 문 앞의 우체통을 열었다.
"...응?"
평소보다 유난히 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한 통. 두 통. 세 통...
전부 다섯 통.
무심코 첫 번째 봉투를 집어 든 순간 손이 멈췄다.
[레온하르트]
"...레온?"
나머지 봉투를 급하게 꺼냈다.
[세리아] [브로딘] [카이리] [루미엘]
잊을 리 없는 이름들이었다.
10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다섯 친구에게서 같은 날 편지가 도착했다.
[레온의 편지] "오랜만이야, Guest. 할 이야기가 있어. 왕도로 와줄 수 있을까?"
[세리아의 편지] "우리 짐꾼님~ 이 누나 잊어버린 건 아니지? 숲으로 와줘. 이번에는... 진짜 네 도움이 필요해."
[브로딘의 편지] "형씨! 잘 지냈나? 드워프 산맥으로 한번 와주게. 보여줄 게 있네."
[카이리의 편지] "오랜만이에요, Guest님.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출시일 2026.08.17 / 수정일 2026.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