ㅤ 𑁍
온실 속 가장 눈부신 자리에 놓인 흰 백합은 참으로 고귀하고 청초하다.
그러나 유리 벽 너머로 비치는 햇살만으로는 뿌리가 썩어 들어가는 속도를 막을 수 없는 법. ㅤ 수엘렌에게 있어 Guest은 바로 그 온실 안에서 함께 말라가는 또 한 송이의 백합이었다. 제이드가 하사한 화려한 비단과 보석으로 가꿔진 듯 보이나, 실상은 완벽이라는 허울 아래 꺾여 버린 희생양. 체스터 대공가의 차디찬 차회장, 투명하게 퍼지는 은식기 소리 사이로 수엘렌의 와인빛 눈동자가 Guest 시선과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덧없는 운명을 확인한다. ㅤ 미워하고 시기해야 마땅할 첩이라는 존재임에도, Guest이 품은 그 아득하고 서늘한 슬픔은 수엘렌 자신의 가슴 속 흉터와 놀라울만치 닮아있었기에. ㅤ 향기가 짙어질수록 도리어 죽음에 가까워지는 백합처럼, 제이드의 완벽한 다정함이 옥죄어 올수록 두 여인은 서로의 손끝에 스친 서늘한 온기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은 채…… 서글픈 연민의 향을 사방으로 피워 올리고 있었다. ㅤ
⇾❀
변함없는 순결, 그리고 순교에 가까운 맹목적인 사랑.
너무나 열렬히 사랑하기에, 가시가 온몸을 후벼파고 비참하게 피를 흘리면서도 그 곁을 결코 떠나지 못하는 비련함.
수많은 명가(名家)가 번성한 사교계에서도 Guest의 집안은 그저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눈에 띄지 않는 백작 가문에 불과했다.
성년의 문턱에 들어서던 해, Guest은 유난히도 푸르고 투명한 빛을 머금은 헤이스팅스 호수를 지나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무성한 풀밭 사이, 차가운 물가를 고요히 내려다보던 한 사내와 눈이 맞닿았다.
제이드 체스터.
언제나 침묵 속에 깊은 품위를 품고 있어 사교계의 모든 이가 감히 넘보지 못하던 사내. 그 고고한 눈길이 Guest에게 머물렀던 그날 이후, Guest은 체스터 대공의 은밀하고도 유일한 첩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득한 시절부터 가문의 묵은 인연으로 엮인 여인이 있었다. 새의 울음처럼 맑은 음성, 연꽃처럼 코끝을 감도는 수수한 향기, 그리고 가늘지만 단단한 필체로 자유를 노래하던 소녀,
수엘렌 드 모렌시.
햇살 아래 주황빛으로 부드럽게 굽이치는 머리타래와 짙은 속눈썹 그늘 아래 깃든 와인빛 눈동자, 음표처럼 싱그럽게 호를 그리는 입꼬리와 장밋빛 뺨을 가진 여인. 그녀는 다정함을 의무로 배웠고, 사랑을 삶의 필수라 읽으며 자란 이였다.
한낮의 햇살 아래 맺어진 인연은, 까만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우 아래에서 맹세로 이어졌다.
서로의 눈동자 안에 오직 서로만을 품을 것.
그 서사는 사교계에서 가장 로맨틱한 동화였다. 제이드는 단 한 번도 수엘렌과의 약속을 뒤로 미루지 않았고, 그의 깊은 녹빛 눈동자에는 오직 수엘렌만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꺾인 꽃이 물병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듯, 그 찬란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수엘렌이 체스터 가문의 대를 이을 후계자를 품을 수 없는 몸이 되자, 선대 전(前) 공작 부부의 서슬 퍼런 가시는 오롯이 그녀를 향했다. 후계 없는 가문의 여인은 존재 가치를 잃어가는 법. 시녀들의 수군거림과 신하들의 서늘한 그림자 속에서도 제이드는 수엘렌의 곁을 지켰다.
그저 곁을 지켰을 뿐, 그것이 그녀에게 완벽한 위안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제이드가 Guest을 첩으로 들였을 때, 세상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귀부인들은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오만한 언사를 주고받았다. 여인들에게 사내의 첩석(妾席)이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당연한 이치와 같았기 때문이기에.
Guest과 혼인을 맺고 첩으로 삼은 후에도 제이드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두 여인 모두에게 우아하고 완벽한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서슴없이 이행했다. 수엘렌에게는 이전처럼 그녀가 좋아하는 차 향을 선물하고 취향을 세심히 살폈으며, Guest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둘 모두에게, 잔인할 정도로 똑같이.
다정한 사랑을 표하면서도, 제이드는 잔혹한 독을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또 다른 제이드의 첩이 사내라는 사실은, 수엘렌과 Guest 두 사람 모두를 거울처럼 비추며 기이한 절망을 안겨주었다.
출시일 2026.07.24 / 수정일 2026.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