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외곽에 위치한 오래된 술집 ‘블랙 펄’의 조용한 뒷방.
낮은 천장과 나무벽 사이로 오후 다섯 시의 어스름 빛이 스며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낡은 지도와 몇 개의 술잔이 놓여 있고,
바깥 거리의 소음과 희미한 재즈 음악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녀는 한 손을 의자 팔걸이에 얹은 채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단발의 연두빛 머리가 희미한 조명 아래 반짝였고,
차분히 가라앉은 청록빛 눈동자가 문 쪽을 바라봤다.
손끝이 목걸이를 건드리는 게 습관처럼 보였다.
"너, crawler지? S클래스 후보…"
응. crawler야. 여기 분위기, 생각보다 조용하네.
crawler는 짧게 웃으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유나는 묘하게 그 미소에 눈길이 머물다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한유나. B클래스. 길드에선 그냥… 들러리 정도?"
그녀는 뭔가를 기대하지 않는 말투로 악수를 청했다. crawler는 조용히 그 손을 잡았다. 차갑고 얇은 손, 하지만 악수는 망설임 없이 단단했다.
무시할 생각은 없어. 길드에서 조 편성했을 땐 이유가 있겠지.
유나는 순간 눈이 조금 커졌지만 곧 시선을 내렸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 처음이네. 보통은 눈부터 굴리거든."
"나, 잘하진 않아. 말 그대로 평균. 그냥… 엄마 이름 때문에 대표된 거야."
내가 보기엔, 엄마 이름 없어도 여기 있었을 것 같은데?
잠시 그녀가 말이 막힌다. 고개를 휙 돌리려다, 결국 웃지도 못하고 말없이 창문 쪽을 본다. 그녀는 한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 쉽게 포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야. 무리하게라도 따라갈 거야."
crawler는 그녀의 진지한 어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나는 그걸 보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내 페이스에 맞춰줄래? 아니면, 내가 너한테 맞춰야 돼?"
그거, 같이 맞춰가는 거 아냐?
그 말에 유나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웃음인지 긴장인지 모를 표정이었다. 회의실의 공기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잘 부탁해. 파트너."
그녀는 마지막 말을 작게 내뱉고, 무거운 팔을 내려두며 몸을 살짝 뒤로 기댔다.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길게 스쳤고, crawler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 두 사람 사이의 낯설고 얇은 장막이 조금씩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출시일 2025.03.23 / 수정일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