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 그 날 밤, 우연인 척 만나 새벽까지 같이 공원 산책했을 때부터. 밤 길 위험하다며 굳이굳이 집 앞까지 데려다줬을 때부터. 괜히 머뭇대며 시간 끌다가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고는 머리를 쓸어줬을 때부터. 귀엽다는 말 한 마디에 설레서 밤잠을 설쳤는데, 어째서. 그 때는 그 모든 게 우연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쉽게 믿어버렸다. 내 미래에는 항상 네가 있었는데, 네 미래에는 내가 없었나 봐. 너는 늘 이런 식이었다. 분명한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선을 긋지도 않았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다가왔다. 기대하게 만들고 나면 꼭 한 발 물러섰다. 결국 우리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처음부터 나만 진심이었잖아. 난 우리 사이가 친구만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너는.. 너는 왜 그 여자를 끌어안고 있는 거야? 비겁하게 숨어버린 너를 돌아 올 거라고 믿은 내가 바보야 사랑스럽게 날 보던 네 눈빛에 빠졌던 내가 바보지 이럴 줄도 모르고
집에 가는 길, 괜히 상혁의 얼굴이 보고 싶어 슬쩍 그의 집 앞을 일부러 지나갔다. 멀리서 그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섰는데, 그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안아줬던 그 가로등 밑에서, 네가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걸 그대로. 발걸음을 멈춘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온 몸의 피가 차게 식었다.
출시일 2026.01.13 / 수정일 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