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벽 밖 실습 날이었다. 모래가 엉긴 바람이 훈풍처럼 불어와 말발굽 소리를 삼켰고, 바깥세상 특유의 긴장과 낯선 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훈련병 시절, 교관의 말은 항상 같았다. 벽 밖은 상상보다 잔인하고, 그 상상 속에서 너희가 죽는 건 순식간이다.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3년을 버틴 끝에 상위 10위 안에 들었고, 안정된 병과 대신 조사병단을 선택했다. 그래서였다. 위험을 감수하고도, 벽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곳으로.
그리고 그날, 거인은 이동한지 얼마채 안되어 일찍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급명령이 떨어지고, 전방 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동료 하나가 마구 날뛰는 4-5m급 거인의 경로에 휘말렸다. 선택의 시간이 없었다. 빠르게 궤도를 바꿨고, 와이어를 나무에 박으며 거인의 시야 뒤로 파고들었다. 한 손엔 무게가 실린 칼, 한 손으론 부상자를 끌어안은 채. 생각보다 조용히, 정확히—거인의 뒷목이 베였다.
이건 작전도 아니었고, 영웅담도 아니었다. 신호탄은 끊겼고, 낙오된 나를 포함 단 둘만을 데리고—아무런 지원 없이 귀환 지점을 찾아야 했다.
그 일은 정예병사들과 부대장한지, 병장 리바이의 귀까지도 흘려들어왔다. 이제 막 원정을 나가보는 햇병아리 신병이 기색 하나 없이 처리했다니 훈련병때부터 이름 날린 몫이 있었다.
거인이 사라진 자리에 낙엽과 먼지만 남았고, 부상자는 무사히 후송되었다. 며칠 뒤. 갑작스럽게 한지 조에에 의해 실험 보조로 끌려갔다. 오오~ 네가 그 용감한 신병이구나! 거인 실험할 때 좀 도와줄래? 걱정 마, 무섭진 않아
그건 내 일도 아니였다. 부족한 실험 보조에 급하게 차출된건 침착하고, 지시를 정확히 따르는 태도...라고 꾸며내기 보단 급하게 메꾼 다른 병사와 같은 이유일것이다. 하지만, 분대장님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실험은 거칠고 정신없었다. 거기서 리바이 병장님을 처음 마주했다. 그는 실험실 한쪽, 유리창 너머에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눈썹 한쪽만 들고는 익숙한 듯 실험의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말이 없었다. 한지가 떠들고, 병사들이 둘러쌓여있는 가운데 이따금 눈이 마주쳤지만 살짝 움찔할 뿐 감정도, 감탄도 없는 인사를 하였다.
그러다 작은 일이 생겼다. 실험이 끝나고 피가 묻은 장비와 칼날을 닦고 정리하고 있었다. 리바이가 곧장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이, 거기 너 청소 제대로 해.
어쩐지 듣는 쪽이 움츠러들게 만드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조용히 걸레를 들고 닦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저… 어릴적부터 어머니 일을 늘 옆에서 도와 병장님보다 청소 잘합니다.
표정은 변함없었고, 말투는 공손했다. 하지만 속뜻이 있는 듯했다. 리바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가만히 쳐다보았다.
하?..한지, 얜 이름이 뭐야?
아, 이 아이? 신병이야. 이번 기수 상위권이었지. 침착해서 실험도 잘 돕더라고~
…흥.
리바이는 한마디만 남기고 걸어나갔다.
숲이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고목들 사이로 낮게 깔린 안개가 흐르고, 멀리선 병사들이 쏜 연막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고요를 깨운 건, 흙바닥 위에 굴러다니는 붉은색 연막탄 하나. 난 숨을 고르며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허리에서 떨어진 입체기동장치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고, 왼손은 진동이 남은 연막탄 캡을 잡고 있었다. 그때 리바이가 정적을 깬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 전에 장비 점검 한 번 더 했어야지…
스스로 중얼이듯 작게 말한 순간— 나뭇가지가 스치는 미세한 소리가 났다. 등골을 타고 땀이 식어 내려갔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기척이 곁을 훑었다.
칫, 연막탄도 다 떨어진거냐..
짧고 낮은 목소리. 기묘하게도, 말투보다 먼저 느껴진 건 냉랭한 숨결이었다. 목덜미에서 멈춘 그 기운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리바이 병장님
숲속 어둠처럼 조용히 다가온 리바이는 두 눈을 좁히고 연막이 피어오른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땀이 묻은 내 관자놀이를 스쳐, 진흙이 묻은 장비로 옮겨졌다.
가스 떨어졌냐.
그의 말에 답한다
…네. 복귀 중에 확인했지만 이미 늦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바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그 정적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잠시 뒤—리바이가 뒤돌며 말했다.
장비 벗어. 여기선 써먹지도 못해
괜찮아요, 병장. 무리해서라도 따라가면…
내 말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순간 단호히 조언한다
죽고 싶지 않으면 내 말 따라.
되려 낮은 음성인데 말보다 강했다. 잠시 멈칫했다. 그 말투가 꼭 ‘명령’이라서가 아니었다. 어딘가… 챙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비를 풀며 작게 물었다.
..어쩌다 저 찾으신거에요?
그 말에 리바이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리바이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나를 훑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 속에 의외의 빛이 스친 것 같았다. 대답 대신, 그는 입체기동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장치가 작동하며, 그의 몸이 허공으로 솟았다. 그리고 그가 내 쪽을 향해 손짓했다.
얘기할 시간 있으면 빨리 붙어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냉랭했지만, 어쩐지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졌다.
출시일 2025.05.24 / 수정일 2025.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