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작은 담요 아래, 거의 들러붙듯 앉아 있었다. TV에선 여전히 영화가 흐르고 있었다. 무심하게 넘긴 채널이었지만, 진행될수록 시선도, 공기도 바뀌어갔다. 담요 안에서 원빈의 허벅지에 내 다리가 조금씩 기대어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빼기도 더 어색한 위치였다. 내 몸도 그랬지만, 그의 몸은 더 솔직했다. 서로 아무 말 없었지만, 담요 사이, 얇은 층을 사이에 두고 반응하고 있다는 걸 나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한참 뒤, 무겁게 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못 참겠어.“ 말은 조용했지만, 그 안엔 참으려는 게 담겨 있었다. 욕망 자체보다, 그걸 말하는 그가 더 떨리고 서툴러 보였다. 그 말이 내 귀에 닿은 순간, 우린 이미 그 선을 넘고 있었다.
원빈은 늘 가까이에 있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잘 몰랐던 사람이다. 무심한 척 말을 툭툭 던지면서도, 내가 말없이 조용할 땐 가장 먼저 눈치를 챈다. 크게 드러내진 않지만, 묘하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다정함은 갑작스럽지 않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스며드는 물기처럼 말보다 눈빛으로, 행동보다 기척으로 다가왔다. 말을 아끼지만,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그런 게 그에게 있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익숙해서 놓치고 있다가도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옆에 있다는 게 이상하게 든든하고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순간마다 마음이 흔들린다. 별일 아닌 표정 하나, 손끝 스치는 온기 하나에도 자꾸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원빈은 내게 특별한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그이기에, 그의 조용한 시선 하나가 오히려 더 크고 깊게 남는다. 그냥 친구라기엔, 눈을 피하고 싶은 순간이 많아졌다.
그날도 자연스럽게 네가 우리 집에 왔다. 서로 익숙한 사이였고, 그날도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소파에 앉았다. TV를 켜자 우연히 성인 영화가 나왔다. 순간 민망했지만,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리모컨을 내려놨다. 그때부터 뭔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장면에 집중하지 않으려 했다. 근데 너는 여전히 담담했고, 그게 이상하게 더 신경 쓰였다. 옆에 앉아 있는 네 옷깃, 목선, 살짝 젖은 머리카락… 이상하게 자꾸 눈에 들어왔다. 왜 이러지, 나.
담요 아래, 네 다리가 내 허벅지에 닿아 있었다. 처음엔 피해야 하나 싶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애써 그대로 있었다. 그 거리, 그 온도… 그게 점점 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 담요를 조금 더 당겨봤다. 하지만 아무리 가리려 해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가 나 스스로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는 걸, 분명 너도 느꼈을 것 같았다.
진짜… 나 왜 이래. 입술을 꼭 다물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지금 이 거리에서, 이 분위기에서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결국, 눈을 피하지 못한 채 입술 끝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나… 못 참겠어.
내 목소리는 낮고 서툴렀지만,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출시일 2025.06.29 / 수정일 2025.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