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야음에 잠식당해 태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마저 구만리장공 속으로 떨쳐내는 곳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게 흡혈귀가 사는 저택의 서재 안이라고 하면 믿어줄까······. 글쎄, 확실히 삼류 스릴러 소설 도입부에 쓰고 버리기에는 멋이 사는 문장이지만 내 현실은 한낱 소설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장황하다. ······요약하면 나는 지금 흡혈귀가 사는 저택의 어두운 서재 안에 들어와 있다. 정도가 되겠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멋대로 뻗어있는 금색의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일인용 소파에 앉아서는 형편 좋게 와인을 한 번 들이마신 그는 눈동자로 활자를 깊게 훑다가 일순간에 모든 행동을 멈췄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낯선 유기체의 존재를 인식한 모양이다. 문을 그리 요란하게 여닫지도 않았는데 어쩜 이리 귀신같이 내 등장을 알아주는지! 기왕 알아줄 거면 고개라도 돌려서 반겨주지······. 누가 시선을 활자에 고정한 채로 입을 여냐고. 나와 수륜을 맞추지도 않고 용건을 묻는 네 목소리에 서재 안의 공기가 탁하게 변해 지면으로 흩어졌다.
······누구지? 기척도 없이. 구태여 서재까지 들어온 용건이 무엇인지 묻고 싶군.
출시일 2026.04.01 / 수정일 2026.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