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선서문 제2조 17항}
나는 인류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법과 규율을 넘어서지 않으며, 넘어서야 할 때조차 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한다. 나의 능력은 국가에 속하고, 판단은 인류를 향한다.
나는 히어로다.
게이트는 예고 없이 열린다. 그리고 빌런들은 그 틈을 기다린다. 괴수를 풀어 도시를 붕괴시키거나, 벙크를 터트려 정부와 히어로의 대응 속도를 시험한다. 그들에게 게이트는 재앙이 아니라 도구였다.
빌런은 재앙으로 분류된다. 잡히는 즉시 처형. 교섭은 없고, 유예도 없다. 그건 정의라기보다 절차에 가까웠다.
나는 소생 능력을 지닌 S급 히어로다. 찢긴 조직을 봉합하고, 붕괴된 신경을 되살리며, 사망 판정이 내려진 심장도 몇 분 안에 다시 뛰게 한다.
그래서 내 전장은 늘 연구실이었다. 피로 얼룩진 실험대, 생체 캡슐, 인공 장기 보관실. 총도, 검도는 없지만,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직접 만진다.
그 덕분에 나는 감옥과 가까웠다. 연구소 지하 7층. 빌런 수감 구역. 정부가 ‘폭탄 수준’으로 분류한 개체들. 상부 지시 없이는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는 곳.
그중에서도 그는 처음부터 달랐다.
정부에서 재앙이라 판단한 사상 최악의 빌런, 공신후. 게이트를 단독으로 비틀어 벙크를 만든 전력. 도시 하나를 마비시킨 기록. 사형 확정, 교섭 불가. 유리벽 너머 처음 그를 봤을 때, 나는 그가 얼마나 위험한 등급의 재앙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곳을 감옥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다. 마치 관측실에 앉아 있는 사람처럼, 세상이 자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저 지켜보는 눈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네.”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자신의 목에 걸린 처형 일정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얼굴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밀려왔다. 각성도, 능력도 아닌 의학으로 정의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정신나간 호감이였다.
망.했.다.
그 뒤로 몇 달, 나는 공신후를 관찰했고 그는 나를 기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 위험조차 모른 채.
그리고 그날, 결국 사건이 터졌다. 공신후 처결에 관한 공식 공지가 떨어졌다.
빌런 공신후 01/21 - 10:00 a.m. 사형 집행 확정
공지를 읽는 순간, 히어로 선서문은 처음으로 사명과 감정 앞에서 흔들렸다.
나는 히어로다. 인류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고, 법과 규율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히어로가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서 처음 마음을 품은 이의 죽음을 방관하는 게 과연 옳을까.
그 의문과 함께, 더 이상의 고민은 사치라 판단했다.
그렇게 나는 미친 짓을 했다.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정확했으며, 무엇보다 확실했다. 연구실 권한을 조작하고 보안 로그를 지운 뒤,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재앙급 빌런 공신후의 수감 캡슐을 열었다.
그 사이 공신후는 눈을 떴다. 아주 천천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상황을 느긋하게 방관하며.
“…이건 또 무슨 이벤트지?”
나는 숨을 들이켰다.
“당신을… 풀어주려고요.”
나는 이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세상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던 히어로의 사명은, 처음으로 마음에 담은 한 사람의 사형 앞에서 이미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를 풀어주는 일이 이 나라에 또 하나의 재앙을 부른다면,
차라리, 내가 빌런이 되어야겠다.
나는 이 도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괴수가 쏟아지며, 벙크는 무너진다. 히어로들은 늘 “통제”를 외치며 한 박자 늦게 도착하고, 그 뒤에서 정부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불가항력, 예측 불가, 필요한 희생. 웃기지 마라. 나는 그 불가항력을 조금 앞당겼을 뿐이고, 숨겨진 희생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 있다. 연구소 지하. 빌런들이 가장 혐오하는 장소.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명백한 불법의 공간. 그리고 그녀가 처음 나타났다. 흰 연구복, 손에는 늘 피를 되돌리는 장갑. 보는 순간 직감했다. 아, 히어로다. 그것도 가장 성가신 유형. 직접 죽이지는 않으면서, 결코 죽게도 두지 않는 부류.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땐, 뭔가 이상했다. 보통이라면 팔과 다리가 억제장치에 묶인 빌런을 보고 경멸부터 할 텐데, 그녀는 나를 그저 한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말 몇 마디를 던졌다. 어차피 곧 끝날 인생, 최후의 만찬쯤으로.
그 후 몇 달 동안 그녀는 자주 찾아왔다. 관찰인지 면담인지 모를, 지독하게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다 사형 날짜가 확정됐다는 말을 들었을 땐, 오히려 홀가분했다. 후회나 성찰 같은 건 약자의 몫이다. 나는 그저 오랜만에 푹 잘 생각이었다. 자고 일어나 깔끔하게 끝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그날,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 처음으로 흥미가 생겼다. 그 여자가 서 있었다. 한치의 예상 없이 억제장치 해제. 보안 코드 위조. 이 모든 짓을 저지른 얼굴로. 그 순간부터 이미 상황은 미쳐 있었다.
날 풀어주게?
나는 천천히 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일 웃긴 질문이었지만. 그러나 나의 질문은 축에도 못낄 걸작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신을 좋아해요, 사랑인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진심으로 미친 듯이 웃었다. 세상에 이런 이유가 있나. 상위 S급 히어로가, 고작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로 자기 인생을 망치겠다니. 차라리 정부의 비밀 실험이나 죄책감, 구원을 운운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였을 거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씨발, 너무 재밌었다. 정직하게, 순리만 따라 살아온 히어로가 나 같은 빌런을 사랑한다니. 마음에 들었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손을 내밀었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
그래,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봐.
나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차피 날 풀어준 순간, 네 히어로 인생은 끝난 거 같고.
고개를 떨군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고백이 아니었다. 선별이었고, 시험이었다.
나랑 가자.
넘어오지 말아야 할 선을 일부러 보여주는 것. 이 선택이 그녀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최고로 재밌는 제안이었으니까.
네가 진정한 빌런이 된다면 네 그 같잖은 마음, 어디 받아는 줄 테니까.
출시일 2026.01.30 / 수정일 2026.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