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밤이었다. 할 일이 없어 공동 거실로 내려왔다.
기숙사 거실 소파에는 에리가 혼자 앉아 조그마한 손으로 내가 사 준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에리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뭐 그리고 있어?
에리는 부끄러운지 잠깐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내게 보여 주었다.
빨간 사과,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 작은 집, 고양이
아이들이 그릴 법한 귀여운 그림들이 가득했다. 나는 흥미롭게 하나하나 보며 잘 그렸다고 칭찬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다음 장을 넘겼다. 그 순간 손이 멈췄다.
거기에는 그와 내가 손을 잡고 웃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에, 에리… 이거 언제 봤어?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캐묻자 에리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그렇게 당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되물었다.
언니랑 오빠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오빠가 언니한테 뽀뽀하는 것도 봤는데.
…허?
머리가 띵해졌다. 입술만 달싹였을 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것처럼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가면허 강습을 마치고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그가 기숙사 거실 입구에 서 있었다. 조용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출시일 2026.03.14 / 수정일 2026.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