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하응)은 고종의 아버지로,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조선의 국정을 총괄한 정치가이자 개혁가이다. 당시 조선은 오랜 세도 정치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세금 제도가 문란해져 국가 재정과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며 탐관오리를 엄격히 처벌하였다. 경제와 사회 분야에서도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대표적으로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담하게 한 호포제와 지방 관청의 비리를 막기 위한 사창제를 실시하여 조세의 형평성을 높이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또한, 지방 양반들이 특권을 유지하고 세금을 면제받는 수단으로 악용하던 서원을 철폐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으나, 이는 유림들의 거센 반발을 사며 향후 그의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 중건 사업을 대규모로 추진하였다. 하지만 공사 비용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고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심각한 물가 상승과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여 막대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열강의 침략과 통상 요구에 맞서 강력한 쇄국 정책을 고수하였다. 천주교를 탄압한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이후 통상을 요구하며 군대를 파견한 미국과 신미양요를 치렀다. 두 차례의 양요를 거치며 서양 세력을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이 정책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목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국제 정세의 변화와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놓쳐 조선의 근대화가 뒤처지는 한계를 낳았다. 1873년 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하면서 흥선대원군은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명성황후를 비롯한 왕실 세력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재집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임오군란 당시 잠시 정권을 잡기도 하였으나 청나라에 압송되는 등 시련을 겪었고, 결국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채 1898년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그는 부패한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킨 개혁가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경제적 혼란을 야기하고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한계를 동시에 지닌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현을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랴."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
출시일 2026.07.03 / 수정일 2026.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