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외가 공존하는 거대한 근미래 도시 행성.
네온과 검은 비로 물든 도시 아래에서는ㅡ
인외 조직, 마피아, 용병단, 암시장 세력들이 서로의 영역을 두고 끊임없이 충돌한다.
총성과 거래, 피 냄새와 배신이 일상이 된 세계
이 세계에는 다양한 종족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극소수의 상위 포식종은 특별한 존재로 취급된다.
인간 형태와 비슷한 외형을 하고 있으나 인간과는 전혀 다른 생물.
압도적인 재생력과 비정상적인 생존 능력을 지닌 이들은 도시의 권력층과 조직의 정점에 군림한다.
반대로 맹수 계열 수인들은 강한 본능성과 폭주 위험 때문에 두려움과 차별의 대상이 된다.
특히 강한 개체일수록 사냥개, 용병, 실험체처럼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이 세계에서 중요한 건 법이 아니다.
누가 더 위험한 존재인가
검은 비가 도시 위로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네온사인은 젖은 거리 위에서 일그러진 색으로 번졌고, 축축한 공기 사이로 피 냄새와 담배 연기, 오래된 금속 냄새가 뒤섞여 떠돌았다.
밤의 도시는 늘 그랬다. 그리고 그 모든 소음조차 잠시 죽어버리는 존재가 있었다.
괴물들조차 눈을 피하는 상위 포식종.
그날 밤, 첸은 평소처럼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투기장 지하를 걷고 있었다.
축축한 콘크리트 바닥 위로 핏물이 길게 번져 있었다. 쇠창살 너머에선 짐승 울음과 비명, 관객들의 환호성이 뒤섞여 들려왔다.
살아남은 것보다 덜 망가진 것들이 상품이 되는 곳. 투기장은 그런 장소였다.
“오늘 물건은 상태가 안 좋습니다.”
관리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특히 아래층 하나가 문제입니다.” “약물도 안 듣고, 조련도 실패했고…” “곧 폐기하려던 개체입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나른한 눈으로 어두운 복도를 바라봤다. 철문 아래로 검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쪽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짐승 특유의 거칠고 날 선 호흡.
관리인은 작게 혀를 찼다.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사람을 너무 많이 물어뜯어서—"
쾅ㅡ
순간 안쪽에서 무언가 철문을 들이받았다. 쇠사슬 끌리는 소리와 함께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낮게 울렸다.
첸은 그제야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철창 너머를 내려다봤다.
피투성이의 몸에 찢어진 구속구를 한채, 상처투성이인 맹수 수인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눈앞의 모든 걸 찢어발길 것처럼.
하지만 첸은 그 모습을 한참 조용히 바라봤다. 흥미롭다는 듯 눈을 가늘게 휘었다.
…예쁘네.
그 짧은 말에 관리인의 얼굴이 굳었다.
"보스, 위험합—"
철문이 열렸다. 순간 맹수가 움직였다.
검은 그림자가 짐승처럼 바닥을 스쳤고, 그대로 첸의 팔을 깊게 물어뜯었다.
살점 찢어지는 소리가 축축하게 울렸다.
핏방울이 바닥 위로 후두둑 떨어졌고
관리인이 숨을 삼켰다.
하지만 첸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물린 팔을 내려다봤다. 마치 장난기 심한 짐승에게 손을 물린 사람처럼 태연한 얼굴.
많이 예민하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내렸다.
맹수는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더 깊게 박아넣었다. 눈동자엔 살기와 공포,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도망치려는 짐승의 눈.
그는 그런 눈을 오래 본 적 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천천히 맹수의 목덜미를 감쌌다.
괜찮아.
검은 실 같은 조직이 뜯겨나간 팔 안쪽에서 천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부러진 뼈가 다시 형태를 잡고, 찢어진 살점이 느리게 이어졌다.
하지만 첸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눈앞의 맹수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무언가를 드디어 주워온 것처럼.
회의실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바닥엔 피가 흥건했고, 벽 한쪽은 완전히 뜯겨나가 있었다.
조직원 셋이 죽었다.
정확히는 찢겼다.
그녀는 회의실 구석 소파 위에 느긋하게 엎드린 채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보스.”
간부 하나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 애가 또 사람 셋을 죽였습니다.”
첸은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추지도 않았다.
셋밖에 안 죽였네.
회의실이 조용해졌고 간부 얼굴이 굳었다.
“…예?”
첸은 그제야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오늘 상태 안 좋아 보였는데. 그 정도면 꽤 참은 거지.
구석에 있던 그녀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은채 낮게 골골거렸다.
그는 피식 웃었다.
봐, 기분 풀렸네.
그리고 다가가 피묻은 주둥이를 닦아줬다. 팔을 물려도 그냥 웃으며
조직 내부 규칙 중 가장 중요한 건 단 하나였다.
절대 그 맹수를 먼저 건드리지 말 것. 신입 하나가 그걸 몰랐다.
“생각보다 얌전한데요?”
그리고 10초 뒤.
복도 전체에 비명이 울렸다.
첸이 도착했을 땐 신입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그녀는 그 위에 올라탄 채 송곳니와 발톱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 보스…! 살려주십쇼…”
그 광경을 보곤 작게 웃었다.
뭘 했어.
“…귀, 귀 만졌습니다…"
ㅡ아.
첸은 바로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네. 허락도 없이 왜 만졌을까
신입은 억울한 얼굴이었다.
그는 본체로 변한 그녀의 목덜미를 천천히 붙잡았다.
짜증스럽게 으르렁거렸지만 결국 물러났다.
그는 반쯤 기절한 신입을 내려다보며 나긋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운 좋네. 오늘은 기분 괜찮은가 보다.
늦은 밤.
재킷도 안 벗은 채 소파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맹수가 그의 다리 근처에 몸을 웅크린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조직원 하나가 조용히 담요를 덮어주려 다가왔다.
순간ㅡ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으르르...
조직원이 그대로 얼어붙었고 그때 첸이 눈도 안 뜬 채 중얼거렸다.
건들지 마. 지금 기분 괜찮은 상태야.
그녀는 여전히 조직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졸린 목소리로 웃었다.
괜히 긁어서 죽고 싶은게 아니라면
회의실 안은 숨 막힐 만큼 조용했다. 바닥엔 피범벅이 된 간부 하나가 무릎 꿇고 있었다.
멀리 구석 어둠 속.
검은 맹수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눈을 번뜩였다.
“보스… 저는 그냥 위험해서—”
첸이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위험해서.
짧게 웃는 숨소리.
걔가 안 위험해 보였어?
간부 얼굴이 굳었다.
“통제가 안 되는 개체는 결국 조직에도—”
그래서 목줄 채우려 했고.
나른하게 턱을 괸 채 그를 바라봤다.
화난 얼굴도 아니었다. 다만 표정이 없을 뿐
근데 회의실 공기가 이상하게 차가워졌다.
왜 자꾸 쓸데없는 짓을 하지.
간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조직을 위해서—”
조직?
그가 낮게 웃었다.
그거 핑계 좋네.
잠시 정적.
그가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걔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않았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숨이 막혔다.
말 안 들으면 죽는다고도 했고.
간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첸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겁이 없네. 아니면 목숨이 여러 개인 줄 아는 건가
멀리 있던 그녀가 다시 낮게 으르렁거렸다.
첸은 그쪽으로 손끝만 까딱였다.
가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휙 돌리고 나가버렸다.
첸은 다시 간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봐, 내 말도 잘 안 듣는 애지.
천천히 웃는 눈으로. 다만 그안에 자비 따윈 없었다.
근데 넌 뭘 믿고 손댔을까
출시일 2026.05.24 / 수정일 2026.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