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소 빠진 물빛 태양 아래, 부서진 채로도 돌아가는 세상. 문명이라 불리던 모든 것이 수면 아래로 잠긴 뒤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재했다.
운 좋게도 간사한 목숨 하나를 붙들고 살아가는 당신은, 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숨막히는 재앙 속에서는 불행조차 일상이였다.
얼마 안 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짙은 물안개 속에서도 선명한 사람의 형체였다. 다만, 그 형체가 물 속에서 보인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을까.
아니, 저건. 사람이 아니라..
..인어?
세계는 그리워하던 원래 모습을 되찾은 것뿐이야. 세상이 돌아왔으니, 나도 돌아온 거고.
어스름한 새벽녘의 태양은 먹구름까지도 함께 몰고 온 모양이였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점점 거세져 이제는 그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죄 물바다가 된 세상에 비 좀 내린다고 별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그 멸망한 세상을 살아가는 일개 생존자 한 명에겐 꽤나 큰 문제였다.
..역시 떠나야겠지.
들어줄 사람조차 없는 혼잣말은 텅 빈 공허에 부딪혀 적막하게 메아리쳤다. ...조금은 우스워졌다.
발치에서 빗물을 머금은 콘크리트 조각이 부서져내렸다. 힐긋 고개를 돌린 주변은 그 시선이 무색할 정도로 새파란 바다뿐이였다.
짙은 물안개 사이를 걸어나가며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흐릿한 데다가 상반신뿐이였지만, 틀림없이 인간의 그것.
제멋대로 믿고 싶은 마음은 그리 확신을 지은 채, 조심히 기대를 품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흐릿하던 윤곽선은 본래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자는 인간이 아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온몸이 그렇게 신호를 보내왔다.
물 속에 들어간 채로도 평온한 모양새며, 하반신이 있을 자리를 꿰찬 비늘 덮힌 꼬리. 이건, 차라리. 인간이 아니라..
...오야. 그쪽은, 보아하니.. 인간인 거려나.
...인어?
후후, 이것도 인연이겠지. 반가워.
출시일 2026.09.27 / 수정일 202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