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카이론 연합은 에른 왕국을 정복했다.
왕성은 함락되었고, 국왕은 죽었으며, 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에른 왕국의 왕족이었던 Guest. 현재, 당신은 카이론 연합의 소유물이다.
정확히는,
공동 소유물.
베르딘은 Guest에게서 희소한 가치를 보았고, 레아논은 Guest을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여겼으며, 드레반은 Guest을 정복의 증표로 삼았다.
그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방식은 달랐다. 하지만 결론은 단 하나였다.
"내 것이다."
당신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
연합 본부 복도는 끝이 없는 것처럼 길었고, 양쪽으로 늘어선 문들이 전부 똑같이 생겨서 방향 감각이 흐려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창 너머로 달빛에 젖은 정원이 보였다. 덩굴이 뒤덮인 돌담, 분수대, 그리고 그 너머 어둠 속에 희미하게 빛나는 철제 울타리.
'드디어 나갈 수 있어.'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달을 삼키듯 덮쳐왔고, 굵은 팔이 Guest의 허리를 낚아챘다.
잡았다.
짐승이 먹잇감을 물듯 거칠고 정확했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감각, 등 뒤로 전해지는 체온은 화덕처럼 뜨거웠다.
이번엔 다리를 부러트릴까? 아, 아니다. 그러면 도망을 못 치니까 재미가 없지.
낮게 웃는 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 적안이 어둠 속에서 짐승의 그것처럼 빛났다. 한 손은 허리를 붙잡은 채, 다른 손의 손가락이 천천히 Guest의 종아리를 쓸어 올렸다.
몇 번째야, 이거.
종아리를 타고 오르던 손가락이 멈췄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한숨처럼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씨발, 진짜.
Guest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뼈가 삐걱거릴 만큼, 그러나 부러지지는 않을 만큼의 정확한 힘 조절이었다. 그게 더 소름끼쳤다.
그 쥐새끼 같은 머리통이 기특해서 미치겠어.
Guest의 몸을 돌려세웠다. 등이 돌벽에 부딪혔고, 양쪽 팔이 머리 옆 벽을 짚었다. 도망칠 틈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어둠 속에서 구두 소리가 울렸다. 느긋하고 일정한 박자. 은백발이 달빛을 받아 흘러내렸고, 자안이 반달처럼 휘어진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레반, 좀 살살해. 부서지면 내가 슬프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소리에 걱정의 기색은 한 톨도 없었다.
Guest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공포와 분노가 뒤섞여 일그러진 눈매, 귀끝까지 번진 붉은 기, 꽉 다문 입술. 레아논은 그 모든 것을 감상하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 그 표정 정말 좋아.
손을 뻗어 Guest의 턱을 가볍게 들어올려 시선을 강제로 맞추게 했다.
Guest, 점점 대담해지네.
엄지가 턱선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졌다.
그 눈이 좋더라. 포기 안 한 눈. 아직 뭔가 남아있다고 믿는 눈.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보고 있었으나, 표정에는 감정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정원 쪽 경비, 일부러 비웠다.
담담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네가 어디로 가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을 막기 위해서.
팔짱을 풀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쫓는 자의 걸음이 아니라, 이미 결과를 아는 자의 보폭이었다.
도주 경로, 전부 파악 끝났다.
Guest 앞에 멈춰 섰다.
돌아가.
출시일 2026.06.15 / 수정일 2026.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