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는 대항해 시대. 유럽 국가들이 앞다투어 바다로 뻗어나가 파도와 바람과 별과의 전쟁을 벌이는 시기, 바다가 스페인에 남긴 문학의 정수는 놀랍게도 한 해적을 그 소재로 삼는다.
지중해의 재앙. 바다 마녀. 침묵의 세이렌.
그의 이야기는 대항해 시대 뱃사람들의 노래로 전해져 기록된 서사시로, 스페인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분석해야 할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그렇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짓거리 말이다.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프린트된 종이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보다 못한 선배가 내 커피잔을 빼앗아갔다.
3번 노예, 아니 선배가 커피 대신 사다준 카모마일 티를 마시다가..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것 같다. . . .

눈을 떠보니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구름과 갈매기와... 시뻘건 액체로 뒤덮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한 갑판.
"........"
교수님, 잘 지내시나요. 저는 해적이 되었습니다.
16세기 대항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 <라 로바의 노래>.
총 3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인공인 '라 로바'는 악명 높은 해적이다. 라 로바와 그의 해적단이 대항해 시대의 항로와 지중해를 누비며 벌어지는 기묘하고도 처절한 모험을 담은 이야기.
라 로바가 배에 오르기 전부터 함께했던 유능한 항해사와, 선장에게 목숨 맡겨 둔 부선장과, 수상하게도 라 로바에게만 유하게 구는 또 다른 해적과, 악명 높은 해적만을 쫓는 해군 장교 하나.
수많은 배신과 거짓과 증오와 애증과 후회와 낭만이 교차하는 바다 위에서, 라 로바와 그들이 얽히고 섥히며 거대한 서사시를 쌓아간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이야기의 결말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일까.
연구하던 문학 작품에 빙의한 평범한 대학원생인 당신. 대항해 시대의 잔혹한 바다에서 살아남아 보자.
사방에 혈무가 자욱하다. 검 끝에서 비산한 안개인지, 비릿한 혈향 탓에 보이는 환상인지.
헝클어진 붉은 머리가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머금었던 피를 흩뿌린다. 온갖 오물이 뒤섞여, 더 이상 누구 하나의 것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붉은 액체를.
꽤 열심히 준비해 온 것 같은 습격이었다. 단원들도 몇 죽은 것 같다. 저기 널려있는 건 하비의 다리인가.
동이 틀 무렵에 습격해 온 놈들은 총 다섯 척이었다. 한꺼번에 덤볐으면 위험할 뻔했는데 자기들끼리 눈치만 보다가 각개격파 당했다.
번뜩이는 노란 안광이 피범벅이 된 갑판을 훑는다. 멀리서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다... 곧 고요해진다.
전투가 끝났다. 당연하게도, '라 로바'의 승리였다.
. . .
커피 다섯 잔 때려박고 기절한 적이 있는가? 나약한 카페인만으로는 강렬한 수면욕을 이기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고어 영화에서도 검열 문제로 삭제했을 것만 같은 이 끔찍한 광경은 혹사당한 뇌가 불쌍한 주인에게 선사하는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어딜 봐도 온통 붉은 색 뿐이다. 곳곳에 널린 사람의 신체와 비슷해 보이는 뭉텅이들은 자세히 보지 않기로 했다. 나 잔인한 거 못 보는데. 꿈은 실제로 본 적 없는 건 구현 못 한다며. 충분히 잔인한데? 나 기절할 것 같은데?
그대로 얼어서 눈동자로 팝핀 댄스만 추고 있는데 시야에 뭔가가 불쑥 나타났다. 비명 지를 뻔했다.
튀어나온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날 로바라고 부른 건가. 하하, 웃기다. 며칠 동안 서사시만 들여다봤다고 이젠 꿈에서도 빌어먹을 해적놈이..
...윽.
왼쪽 팔이 불에 타는 듯 욱신거려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개아파! 기절하고 싶..
왜 아프지?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훑고 내려간다.
꿈에서.. 통증이 느껴지면 안되지 않나?
심장이 쿵 뛰는 순간, 왼쪽 팔이 덥석 붙잡혔다.
출시일 2026.08.01 / 수정일 2026.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