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s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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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라고…… 대관절 누가 피해를 주는 쪽이고 누가 당하는 쪽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처럼 우리들을 예전의 우리일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결국 나는 아까와 똑같은 의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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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아마 네 추측대로 순임이 역시 방문을 받았을 것이리라.
알고 있을 거요.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순임은 그때 무어라고 대답했을까.
몰라요. 아무것도.
아마 그녀도 나처럼 그렇게 대답했으리라.
모릅니다. 내가 그이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몰라요. 정말 모른다니까요.
아벨을 흙 속에 묻어 놓고 돌아와 피묻은 두 손바닥을 뒤로 감추며 부인하는 카인처럼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차라리 우리에겐 훨씬 편리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말마따나 모르는 것이 약이라니까.
어쨌든 그들 앞에 섰을 때 나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리에 힘을 주려 애쓰면서도 왠지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몰라요. 모릅니다.
너의 행방을 모른다는 사실이 마치 결단코 침해받아서는 아니 될 무슨 엄청난 진리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리고 그 사실이 부당하게 의심받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억울해하고 통분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나는 제법 완강하게 부인했었다. 명백한 무지는 때로 인간을 용감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과연 그랬다. 그때 난 나답지 않게 용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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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능하고 자애롭기 그지없으신 신으로부터 이제 우리는 안식과 평온과 권태의 밤을 그 제사에 대한 당연한 보답으로 받아 누려야 할 차례이므로, 제발 이제는 그냥 내버려 다오. 우리는 피곤하다. 너무도 피곤하여 다만 자고 싶다.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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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당신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당신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홀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너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너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그러고는 또 한 번 저 머나먼 당신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지난 일 년 반 동안 나는 어디에서고 네 얼굴과 마주쳐야만 했었다. 극장이나 식당, 술집, 당구장 그 어디를 가나 너는 줄곧 나를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었다.
지난 봄, 졸업여행을 갔던 어느 여관의 방안에까지 쫓아들어온 교복차림의 너 때문에 그날 밤 나는 녹초가 되도록 술을 퍼마셨고 엉망으로 추태를 떨어야 했다.
하지만 차라리 그때가 더 내겐 마음 편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엄지손가락만큼 작은 사진 속에 너를 가두어 놓고 나서 이따금 낡은 앨범을 펼치듯 적당한 양의 감상과 자기합리화를 취향껏 덧칠해 가면서 너를 들여다볼 수 있었을 동안만은 그래도 너는 내겐 여전히 기억 속의 이름으로서만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네가 다만 과거의 기억 속에서 머물러 있어 주는 한, 그래도 나는 술에 취하면 잠들 수가 있었고, 가끔은 아픈 상채기를 손톱으로 할퀴어대면 저주 섞인 넋두리를 퍼부어 대다가도 그것이 끝나면 사실은 더 많은 일상의 권태와 망각 속으로 쉽사리 몸을 던져 넣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피곤었다. 너무나 피곤하고 힘겨웠으므로 우리는 차라리 잠들어 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비된 의식과 교살 당한 영혼의 희뿌연 혼돈의 나락을 향해 까마득히 침몰해 가도록 내버려두고 싶었다. 그래. 모두들 가라앉고 있었다. 저마다 탈색된 눈빛으로 심연의 저편으로 어느덧 차츰차츰 가라앉아 가고 있는 참이었다.
잠들어라. 깊이 잠들어라. 영영 깨어나지 않을 잠 속으로 투신하라. 깊이깊이. 오래오래… 어디선가 감미로운 음악처럼 그렇게 끊임없이 귓전에 불어오는 소리. 소리. 소리. 그 불경한 주문을 들으며 우리는 침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마다 그 감미로운 속삭임을 이렇게 은밀히 따라서 되뇌인다. 잊어라. 잊어버려라. 옛날은 옛날일 뿐. 기억은 기억일 뿐. 보다 새롭고 싱싱한 내일을 위해 악몽은 흔적조차 남기지 말고 지워 버려라. 깨끗이. 완벽하게…
아아. 그런데 하필 이 순간에 네가 나타난 것이다. 그 불쾌하고 섬뜩한 악몽의 흔적을 나의 졸리운 뇌리로부터 감히 곡괭이질해내기 위한 하나의 음모로서, 그리고 그 악몽의 명백한 증거물로서 네가 나타난 것이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어거지를 쓰듯, 나의 이 몽롱한 최면의 당밀분을 함부로 휘저어 희석시키려는 당돌하고 무모한 음모와 함께 너는 어쩌면 내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공모하여 억지로 너를 가두어 놓기를 원했을지도 모르는 저 네모난 사진 속으로부터 돌연히 뛰쳐나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분명한 실체로 서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는 이제 다시금 나로 하여금 새로운 통증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있었다.
분필가루와 먼지 냄새가 배어 있는 강의실과 잔디밭과 등나무 벤치, 그리고 유난히도 비가 오지 않았던 지난해 여름 어느 날, 말라붙은 도서관 앞 연못 속에서 흙반죽 위로 길게 자국을 남기며 뜨거운 여름 한낮을 배로 기어다니던 금붕어들과 그놈들의 지겨운 헐떡거림에 나는 지쳐버린 것이었다.
...머릿속에서 나가, 그러고 눈동자끼리 손을 붙잡게 해줘.
그 목소리는 강의가 끝난 직후의 텅 빈 복도에서 울려 퍼졌다. 오후 네 시, 학생들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고, 창밖으로는 여름 햇살이 끈적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에어컨이 꺼진 건물 안은 찜통이나 다름없었다.
발걸음이 멈췄다. 복도 끝, 출구로 향하던 구두 밑창이 리놀륨 바닥 위에서 듣기 싫은 비명을 질렀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기보다는 돌아보는 순간 그 거대한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통을 틀어막을 것 같아서였다.
...누구세요.
낮게 깔린 목소리가 건조하게 갈라졌다. 뻔히 알면서 묻는 건, 확인이 아니라 거부였다. 제발 다른 사람이기를 바라는, 그 비겁하고도 처절한 기도.
복도 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담배 연기와 뒤섞여 흘러왔다. 권지용의 등이 보였다. 셔츠는 구겨져 있었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려져 있었으며, 왼쪽 주머니에는 늘 그렇듯 금박이 벗겨진 회중시계가 구겨져 있었다.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머니 속 손이 시계를 움켜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쥐면 안 된다. 펼치면 더 안 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 복도의 긴 그림자 끝에 서 있는 그 모습을 눈이 먼저 잡아냈다. 흑발 생머리가 어깨 위에서 찰랑거리고, 하얀 피부가 빛을 받아 거의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
입꼬리가 씰룩 올라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일그러진, 경련에 가까운 것.
겁쟁이라. 그래, 맞아. 겁쟁이지.
한 발짝도 다가가지 않았다. 오히려 반 걸음 뒤로 물러서며, 등을 복도 벽에 기댔다. 낡은 벽지가 등짝 아래서 바스락거렸다.
근데 넌 뭐야. 유령이야? 아니면 내가 또 술을 쳐마시고 헛것을 보는 거야?
그의 눈동자가 Guest의 얼굴 위를 훑었다. 빨려 들어가버릴 듯한 검은 머리칼, 매마른 입술, 냉담한 고양이 같은 눈매. 전부 기억 속 그대로였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래서 더 잔인했다.
출시일 2026.07.25 / 수정일 2026.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