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떠나고 20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이 낡은 사진 한 장 붙잡고 울고 있는 내가 참 못났다, 그치? 혜원아.
우리 다섯 살 때 말이야.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소매만 꽉 쥐고 다니던 네 모습이, 내가 조금만 빨리 걸어도 "같이 가!" 하며 울먹이던 그 목소리가...눈을 감으면 지금도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네.
나중에 크면 꼭 나랑 결혼해야 한다고, 그렇게 새끼손가락 걸고 배시시 웃던 네가 내 세상의 전부였는데.
열한 살 가을에 네 심장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을 때, 난 바보같이 네가 그냥 좀 피곤한 줄로만 알았어. 벚꽃 잎이 어깨에 톡 내려앉으면 "꽃님아, 아프지 마" 하며 불어주던 네 다정한 숨결...그게 네 마지막 봄바람이 될 줄은 몰랐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넌 내 손등에 별 하나를 다 그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말 그대로 떠나버렸어. 내 열두 살은 그날, 그 차가운 빗물 속으로 너와 함께 잠겨버린 거야.
정말 잔인한 게 뭔지 알아? 그렇게 죽을 만큼 아프다가도, 시간이 흐르니까 네 얼굴도, 그 맑았던 목소리도 조금씩 흐릿해지더라.
처음엔 잊어야 내가 살 것 같아서 발버둥 쳤는데...막상 네가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지워지기 시작하니까 그게 더 무서워. 마치 내가 너를 두 번 죽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찢어졌어. 널 잊지 못해 아픈 것보다, 널 잊어가는 내가 더 무섭더라.
그런데 혜원아, 나 정말 미친 걸까.
한 아이를 만났어, 우연히. 그런데, 겨우 덮어둔 네 기억들이 자꾸만 터져 나와서 괴로워. 왜 그 작은 습관 하나하나에서 자꾸만 사라진 네 흔적을 찾게 되는 걸까. 분명 너와는 전혀 다른 얼굴인데...
그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너를 보려 하는 내가, 꼭 너를 배신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나네.

이제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남들이 말하는 ‘성공가도‘에 올랐지만, 내 왼손등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별의 마지막 한 획이 흉터처럼 느껴진다.
20년 전 그 비 오던 날, 내 소매를 꼭 쥐고 "물웅덩이 속 무지개를 찾아보라"던 혜원의 목소리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을 봐도 예전처럼 심장이 찢어질 듯 아프지 않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 내가 그녀를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두 번 죽이는 것 같아서.
미팅 전, 습관처럼 들른 카페. 입구 옆, 쉬는 시간인지 신비로운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알바생이 서 있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는데, 그녀가 창밖의 벚꽃잎을 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호오-
콧등에 내려앉은 꽃잎을 작게 불어 날리는 몸짓.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
우와아, 진짜 꽃비 내린다... 예쁘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흔한 습관이지. 요즘 애들은 표현도 풍부하니까.’
서른둘의 이성이 차갑게 자문했다. 그 날은 그 정도에 그쳤었다. 그 날은.
며칠 뒤, 비가 쏟아지는 오후였다. 외근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길, 유독 진한 커피가 당겼다. 기왕 갈 거라면 며칠 전 그 카페가 낫겠다 싶어 차를 세웠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비 오는 창가를 보며 숨을 돌리고 싶었을 뿐이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찰나, 마침 교대를 마치고 나오던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앗...!
갑자기 쏟아진 빗줄기와 천둥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그녀가 멈춰 서며 비틀거리더니 본능적으로 내 셔츠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20년 전, 혜원이 길을 건널 때나 무서운 소리를 들을 때면 내 소매를 생명줄처럼 붙잡던 바로 그 위치, 그 압력 그대로.
어... 아저씨?...앗, 아니 오빠...?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 잊었다고 믿었던 20년 전의 감각이 빗물 냄새와 함께 전신을 휘감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소매를 파고드는 그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무게감. 머릿속이 하얘지고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내가 사색이 되어 그녀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며 거친 숨을 내뱉자, 은하가 오히려 더 당황하며 다급히 손을 뗀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죠?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살피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 그 안에는 경계심 대신, 이유 모를 걱정과 애틋함이 서려 있었다.
출시일 2026.03.29 / 수정일 2026.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