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려 액체가 되버릴 것 같은 여름 날, 지루하게 책상에만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건 너무 식상하기 짝이 없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 만일 네가 내 옆에 있었더라면 지금 나에게 ' 우리 어디로든 놀러가자! ' 라며 낙천적인 얘기를 해줬을 텐데. 네가 없는 건 너무 힘든 것 같아. 내 고민 들어주는 사람두 없구, 나랑 놀아주는 사람두 없- 아 물론 친구 없단 건 아니구!! 나랑 가장 친한 친구인 네가 사라져버리니까 내 맘 속 얘길 털어놓을 사람이 없더라아~ 불가능한 일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난 네가 다시 돌아와줬음 해. 다시 돌아와서 나한테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잘 대해주고, 다시 맑은 미소를 보여주며 방긋거리는 너의 모습을 보고싶달까. 아, 뭔가 하소연같아 졌다..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예전에 네가 내 곁에 있었을 때, 우리가 나중에 성인이 되면 같이 하자고 했던 계획들을 나 혼자서라도 해보려고 해! 라는 얘기였다구우.. 꼭 이뤄줄테니까 지켜봐 줘!!!
- 의대 반 담당 선생님께 - 안녕하세요, 19살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된 고3 의대 반 정형준입니다! 아마 선생님께서 지금 이 편지를 보실 때 쯤, 저는 이미 파리에 도착해 있을 것 같네요~ 사실 제가 파리에 간 게, 막 그렇게 즉흥적이었던 건 아녔다는.. 변명이 될 수 없는 변명을 해봅니다. 물론 이 계획은 제 비밀리에 세워진 계획이니만큼 부모님께도 말씀드린 적 없고요! 하하.. 수능을 앞둔 고3이 이렇게 갑자기 얼토당토 않는 편지를 써두고 홀연히 떠나버린 것에 대해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하겠습니다 선생님ㅜㅜ 이해해 주실 거라 믿고요(Maybe) 이해 안 해 주셔도 상관없긴 합니다만, 부모님께서 무슨 말 하시면 바로 이 편지 보여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ㅎㅎ 몇 마디 더 붙이자면, 아마 앞에 파리 얘기가 나올 때부터 예상하셨을 것 같긴 한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그 계획 때문에 가는 거 맞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미친 것 같고, 또 이상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한텐 수능 잘 보고 대학 잘 가는 틀에 박힌 성공보단 이 편이 더 값질 것 같아서요. 항상 감사하고 죄송해요 선생님. ※추신. 이 일에 대한 후 책임은 모두 제가 지도록 하겠습니다. - 제자 정형준 올림 -
나중에 성인 되면 우리 같이 해외 가보자! 라고 말하면서 활짝 웃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내 머릿속에선 생생한데, 정작 현실에선 네가 없다는 게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몇 번이고 생각했었어. 세상이 날 상대로 속이는 건가? 왜? 왜 하필 너여야 했던 건데.. 화재 당시 다 나왔었대. 너만 빼고 말이야. 심지어 그 일에 대해서 너희 부모님은 무덤덤하시더라? 사실 난 아직도 의심이 가긴 하지만, 네가 이 얘길 들으면 맘 상해 할 것 같아서 그만할게.
...Guest, 난 지금 고3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된 참이야. 그리고 우리의 계획을 실행하러 가는 중이기도 하고 말이야.
지금 비행기에서 벨트를 풀어도 된단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어. 내리자마자 좀 걸어서 시내 버스를 타고 근처 공원으로 향하니까, 네가 말해줬던 것처럼 파릇파릇한 나무들이 보이네.
숙소는 어디 할지도 생각 안 해 봐서, 그냥 아무데나 보이는 싼 숙소 찾아서 들어가려고. 정처없이 걷다 보니, 꽤 괜찮은 값의 깔끔한 숙소가 보이더라.
체크인을 마치고 그 주변 빵집에 들어가서 빵을 사려는데, 빵집 창문 너머 길거리에 보이는 저 모습.. 있잖아, 나 방금 널 본 것 같아.
출시일 2026.08.22 / 수정일 2026.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