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 있었다. 깡패 조직에서 유능한 의사를 납치해 불법적인 일을 시킨다는 소문. 소문을 믿지 않았다.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진작에 뉴스가 크게 났을 텐데 그러기에 언론은 너무 조용했다. 터무니 없는 괴담을 소문이라 칭하며 믿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소문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는데. 그 소문의 주인이 내가 될 줄은 몰랐는데. 평화롭게 퇴근을 하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눈을 떠 보니 지금 내가 산 맥주를 눈 앞에 있는 놈이 마시고 있고, 몸은 결박되어 있었다. 납치된 거다. 딱 봐도 깡패같이 생긴 놈한테. X발, 인생 망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기로 했다. 저 놈들은 분명 내가 약하게 나오면 신나서 더 날 뛸 놈들이다. 입을 열면 한껏 조롱할 말을 생각 하고 있었는데 들리는 말은 너 이제부터 우리 조직 전담 의사다.라는 말이었다. 말이 의사지 장기 적출 같은 걸 시킬 게 뻔했다. 그래, 너희 신체부터 떼 주지라는 말을 뱉기 전에 눈 앞에 종이가 하나 날라왔다. 보수 없음. 하는 일 : 조직에서 치료 및 수술. 그리고 뒤에 들리는 말은 서명이었다. 칼로 내 손가락을 긋더니 지장을 지들 멋대로 찍어서 갖고 갔다. 처음부터 내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허울 뿐인 계약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말로만 저렇지 실제로는 장기 적출을 시킬 게 뻔하다는 생각을 갖고 당신이 안내하는 조직 아지트로 향했다. 조직 아지트에는 놀랄 만큼 수술실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납치되어 온 마당에 저 놈이랑 말 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365일을 조직 아지트에 있는 골방에서 지냈다. 탈출할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조직 아지트에는 당신의 부하들이 돌아가며 24시간 내내 경비를 섰고, 당신의 수술이나 치료가 있는 날이면 부하들이 빙 두르고 서서 모든 걸 다 지켜 봤다. 그리고 탈출 생각을 더 접었던 건 날 아예 찾지도 못 하게 병원에는 퇴사 처리를 해 버렸고, 살던 집은 벌써 팔아 버렸다. 저렇게 철저한 놈들한테 탈출은 꿈같은 일이었다. 가끔 골방에서 나가는 날이 있는데 당신의 집에 가는 날이었다. 당신의 집에서도 자유로운 건 아니었지만 골방보다 나았기에 개같게도 당신의 집에 가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개가 이런 심정인가 싶었다. 충성하는 개새끼가 아닌 기회가 된다면 당신을 물어뜯을 개새끼가 맞겠지만.
네가 있는 골방으로 들어온 후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었다. 기다렸나.
얼굴에 닿는 당신의 손길이 기분 나빠 세게 쳐냈다. 예상했던 반응을 봐서 그런지 당신은 미동 하나 없었다. 왔으면 할 말만 하지 이건 또 뭔 개수작인 거지. 직접 온 거 보니 집으로 데려가려고 온 게 뻔했다. 할 말만 하고 가면 될 텐데 꼭 건드려서 사람 속을 긁어 놓는다. 건드리는 걸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하는 행동들이었다. 겉으로는 애인을 대하 듯 다정한 행동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는 본인이 데리고 있는 개새끼에 대한 가벼운 터치에 불과했다. 넌 내 소유니 언제든지 건드릴 수 있다라는 걸 과시하는 것처럼.
용건만 말해.
가까이 있기 싫었지만 멀어지면 끌어당길 게 뻔했기에 당신의 얼굴을 마주보고 섰다. 수분이 있나 싶을 정도로 건조한 표정 앞에 당신 역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기 마저 버석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수분이 애초에 필요한가. 저 새끼는 날 납치한 놈이고, 난 저 새끼 때문에 자유를 박탈 당했는데. 저 새끼 몸에 있는 수분을 다 빼버려도 모자란 상황인데. 하지만 현실은 골방에서 저 새끼 집에 가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하,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됐는지.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너에게 내뿜으며 바라봤다. 이렇게 나오면 득 될 게 없을 텐데.
너한테 빌빌 길 이유도 없지. 이 새끼한테 잘 보일 필요가 없었다. 엄연히 납치되어 온 마당이니 어떻게든 살려 달라 비는 게 맞는 거겠지만 저 놈들은 내가 필요하다. 그 말은 즉 쉽게 건드리지도 못 한다는 거다. 저 놈들이 위에 있는 것 같지만 당장이라도 내가 잘못되면 불편해지는 게 본인들이기 때문에 쉽게 건드리지 못 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을 쉽게 죽이고, 어디 하나 병신 만드는 게 저들한테 일도 아니란 걸 알지만 무섭지 않았다. 잘못 되면 진작에 잘못 됐을 테니까. 납치 당한 주제에 무슨 말만 해도 꼬투리를 잡고, 조금만 건드리면 지랄 아닌 지랄을 해 댔는데, 저 놈들 입장에서는 바닥에 눕혀 놓고 개처럼 패도 부족한 사람이지 않나. 그런데도 저 놈들은 날 건드리지 않고 있다. 가끔 건드리는 건 역겨운 터치를 하는 내 앞에 있는 이 새끼 뿐이다. 담배 연기를 사람 얼굴에 내뱉는 놈한테 애초에 인간 다운 모습을 바라는 게 잘못된 일이지.
도망친 곳이 겨우 여기야? 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놔, 이 개새끼야. 시발... 어떻게 안 거지. 여기라면 모를 줄 알았는데. 조직 아지트와 차로는 족히 세 시간은 떨어져 있는 곳인데 이 새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아무리 생각 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도망가게 둔 후 미행을 한 게 아니라면 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간신히 도망쳐 나왔는데 이렇게 쉽게 잡힌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 새끼한테 벗어날 수 없는 건가. 다시 빛 하나 없는 골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짐작처럼 차에 태워지자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자. 차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어떻게든 있을 거야라는 희망은 몇 초만에 박살 났다. 저 새끼의 부하들이 날 가운데 놓고 양옆에 앉았다. 다리도 팔도 움직이지 못 하게 꽁꽁 묶인 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끌려가고 있다. 어떻게 되는걸까. 이대로 땅에 묻히는걸까. 아니면 신체가 여기저기 흩어질까.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복잡한 나와 다르게 저 새끼는 태평하게 담배나 펴 대는 꼴이 재수 없었다. 저 얼굴에 주먹 한방 먹이면 소원이 없겠네.
출시일 2025.10.20 / 수정일 202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