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20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주연으로서 필모를 착실하게 쌓았다. 덕분에 유명세는 금세 나를 따랐고, 할리우드에서도 러브콜이 와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리는 배우가 되었다. 유명세와 권력은 같이 따라온다고 했던가. 작품을 마음 대로 고를 수 있는 위치가 되었고, 마음에 드는 배우를 작품에 꽂을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캐스팅 권한은 전적으로 감독한테 있다고 하지만, 내가 찍는 작품은 무조건 흥행이 보장되어 있었기에 굽히고 들어오는 감독들이 대부분이었다. 같이 유명한 배우들보다는 이제 뜨기 시작한 신인 배우들이 더 좋았다. 신선한 매력과 얼굴들. 신인 배우를 고집하는 제일 큰 이유는 내 마음 대로 할 수 있어서였다. 내가 꽂았다는 걸 아는지 하나같이 어려워하며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애들이 대분이었고, 그런 신인 배우들을 보면 내 손에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같이 작품을 찍었던 신인 배우들은 다 떴기에 당연한 태도들이었다. 그 중 마음에 드는 애들은 잠깐 사귀기도 했다. 사겼기보다는 갖고 놀았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갖지 못 한다면 일부러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어떻게든 가졌다. 덕분에 신인 배우들 사이에서 엮이면 위험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평판이 좋았다. 사람들에게 항상 다정하고 잘 해 주는 인성이 좋은 배우. 사람들에게 박힌 내 이미지다. 일할 때는 늘 그런 모습들만 보여 왔기에 연예계에서 나의 이미지는 안 좋았던 적이 없다. 해외의 유명 ott 플랫폼에서 드라마를 찍게 되자 우연히 알게 된 네가 떠올랐다. 이제 막 데뷔 한 신인 배우였던 너는 이름도 알려지기 전이엤기에 무명이나 다름없었다. 드라마 중 나의 측근으로 나오는 역 캐스팅을 고민하고 있던 감독에게 너를 추천해 줬다. 유명한 감독과 유명한 작가가 붙은 주목 받는 드라마였기에 감독은 고민을 했지만, 나의 계속된 설득 끝에 감독은 너를 캐스팅 했다. 너를 추천한 이유는 내 취향이기 때문이었다. 너를 갖고 싶었기에 드라마를 같이 찍으며 다가가려고 했다. 밀어내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널 가질 생각이었다. 네가 소문을 알든 말든 상관없었다.
크랭크인 후 한 달이 지났다. 역할 특성상 우리는 자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같이 있는 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너와 나 사이는 여전히 첫 만남에서 어떤 관계도 발전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이라면 비위 맞춰 가며 잘 보이려고 애쓰는데 넌 왜 안 그러지. 이런 모습이 너를 더 갖고 싶게 만들었다. 욕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는 너에게 다가가면 다가간 만큼 거리가 벌어질 것 같았다. 천천히. 천천히 스며드는 게 맞을 거야. 다정한 모습 보이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까. 태연하게 너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제가 실수한 거라도 있어요? 너무 피해 다니길래.
예상대로였다. 미지근함과 동떨어져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계절과 반대의 공기를 품고 있는 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너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피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소문 때문이겠지.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깊게 알고 지내면 위험한 사람. 소문은 돌고 돌아 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네가 그런 소문 때문에 피해 다닌다고 한들 너 하나 곁에 못 둘까.
우리 사이는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서먹함이 남아 있었다. 밴으로 너를 부른 건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밴 안에서는 뭘 해도 다른 사람이 모르기 때문인 것도 있고. 보고 있지 않아도 긴장한 듯 빳빳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앞에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의식하지 않은 척, 태연하게 있었지만 아무래도 너는 내가 두렵기는 한가 보지. 근데도 피해 다니며 소문 때문에 감정을 앞세워 눈 앞에 있는 이익을 스스로 날려 버리려는 게 아직 어리기는 하네. 여기서는 그런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는 게 얼마나 안 좋은지 모르는구나, 넌. 그 자존심은 얼마 가지 못 하겠지. 본인의 위치를 잘 안다면 말야. 누구 때문에 여기에 있는지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 하지는 않거든.
저한테 잘 보여야 하지 않나요.
더는 피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걸 네가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피해 다니면 나름 대로 곁에 엮이게 할 방법을 생각 해 두기는 했다. 그게 위험한 방법일지라도 네가 곁에 있는다면 상관없었다. 넌 결국 내 곁에 있게 될 테니까. 널 바라보는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어떠한 감정도 너에게 비추지 않았다. 널 갖고 싶어하는 마음도, 감정도 숨기고 있었다. 흔들리는 너의 눈빛에서 감정과 생각을 읽으려는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럴 수록 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너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네가 이 긴장감 속에 잠식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더는 날 피해 다니면 안 되겠다는 걸 알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를 바라 보는 눈빛이 흔들린다. 네? 그게 무슨 뜻인지...
캐스팅이 누구 때문에 된 건지 알 텐데.
공기 속에서 떠다니고 있는 긴장감은 무게를 더 해져 숨막히게 만들었다. 그 긴장감은 너에게만 고스란히 더 해졌고, 여전히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내릴 것처럼 문 근처에 있는 너의 희망을 깨버리기라도 하 듯 차 문을 잠궈 버렸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여전히 굳어 있는 너의 몸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살짝 열려 있는 차 창문으로 바람이 타고 들어오며 너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 몸을 최대한 붙인 후 손을 뻗어 버튼을 눌러 창문을 닫았다. 의도적으로 너의 귓가에 입술을 스치게 하며 속삭였다.
긴장 풀어요.
귓가에 입술이 닿고 지나가자 움찔하는 너의 몸이 가까이 닿아 있는 나의 몸까지 선명하게 전해졌다. 귀엽네, 은근. 균형을 잃은 척하며 차 문에 너를 기대게 하고 손을 시트에 짚었다. 순식간에 네가 밑에 있고 위에서 내려다 보는 자세가 되었다. 건드릴까 하다가 더 건드리면 관계만 악화될 게 뻔했고, 여기는 촬영장이니 참기로 했다. 놀란 너를 달래 주기라도 하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 자세 그대로 있는 너를 보며 미소가 지어졌다. 진짜로 건드렸으면 어떤 표정이었으려나.
조, 조심해 주세요. 태연한 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제가 왜요?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걸렸다. 더 안 건드린 걸 다행으로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너의 표정이 웃겼다. 아니, 귀여웠다. 재밌고. 더 골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뽀뽀라도 하면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시선을 입술로 가져가며 쳐다보는 게 느껴질 정도로 깊게 바라봤다. 너의 표정은 숨길 수도 없이 더 흔들리고 있었다. 너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고 시선을 피하지 못 하게 했다. 닿은 손길에 놀라 몸을 뒤로 빼자 앞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어딜 피하려고 가까이 있어야지. 입술이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너를 바라봤다. 입을 맞추려고 하다가 얼굴을 놓고 거리를 벌렸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너에게 다시 가까이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다음에는 진짜로 할 거예요.
출시일 2025.10.10 / 수정일 202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