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좋아하는 방랑자 양반.
그럼에도불구하고도망다녀야만하는이비참한삶의끝은어디까지인가그런내꼴이스스로우습기도 하고그렇다면나는어찌해야
술을 마지막으로 양껏 마신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은 성 싶다.
황혼녘의 주막은 생각 외로 부산스럽지 않았다. 노을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해가 슬금슬금 눈꺼풀을 붙이려 산 아래로 도망하는 것이 퍽 포졸들에게 쫒기는 제 신세같아 괜스레 처량하다. 남은 엽전은 겨우 일곱. 따악 술 한 병 마실 처지는 되었다. 주머니 속 너희에게 깊이깊이 숨어라 경계했거늘, 황혼녘 들판의 주막에 술을 보았으니 어이할꼬. 고민이 시작되었다. 어째야 하나. 해는 저를 놀리듯 고개를 숙이고, 주막에서는 달짝지근한 막걸리 냄새가 이리 오라 손짓하고, 목은 바싹바싹 타 죽기 직전인데. 어느새 여럿의 선비들이 주막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술을 주문하는 쩌렁한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우성을 쳐 대는 배를 달래며 고민만 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들은 정자 위에 앉아 만찬을 즐기기 직전이었다.
어느새 몸은 주막에 앉혀져 있었다. 얻은 것은 있었다. 술 한 병과 같이 받은 부침개 한 장. 아니, 혀 빠지게 배고파하고 뒷감당 생각 없이 앉았다는 점에서는 손해가 막심했다. 주머니 속에 꽁꽁 숨어 있던 엽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세상에는 듣지 않는 것이 나은 결론도 있는 법이니까. 온 몸의 뼈가 술에 절여져 축축하게 녹아내리는 나른하고도 흐물텅한 기분이 몰려왔다. 곁들여 내는 부침개도 맛있었다. 바싹바싹 타던 목이 순식간에 촉촉해지고 맥박이 빨라졌다. 가뭄이 막심하던 뇌가 알코올에 절여진 무의식을 와르르 토해냈다.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눈동자가 흐리멍텅해진 것은 술병을 두 개 즈음 비웠을 때였다. 예상보다는 많은 양이었으나 오랜만에 알코올을 흡수하는 저를 골로 가게 만들기엔 충분한 듯 싶었다. 맨정신도 아니었을 텐데 어찌 알았냐 함은, 아무리 제기 방랑하며 도망자의 삶을 산다 한들 길은 있는 법이었다. 사람마다 잘 하는 것이 꼭 하나 즈음은 있듯이(잘 하는 것이 없다면 아직 자신이 잘 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지, 잘 하는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내게도 좀처럼 내 주량을 잊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제정신과 알코올 속, 그제서야 걱정이 밀려온다. 엽전이 부족할 것 같았다. 정말 따악 한 병만 마시려 했다만, 오랜만에 술을 들인 몸이 먼저 정신을 놓았고, 정신이 이성을 놓아버렸다. 농사 짓고 사는 농민들은 힘든 농사를 짓고 나서 새참과 농주(農酒)를 먹는다는데, 금주령에서도 농주는 예외라는데, 왜 나는 평민들도 물처럼 마셔 대는 술을, 왜 나는 엽전 내고 손까지 벌벌벌 떨면서 한 잔씩 들이키는가. 취기는 올라온 지 한창이었고, 얼굴은 후끈후끈해져 뇌 속에서 맥박이 이는 느낌이 선명했다. 상 위에 고개를 박아버렸다. 당장 오늘 밤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포졸들이 저를 잡을 것이고 관아에 갇힐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히 썩어 나갈 것이며.. 주모가 '이 양반이 왜 여기서 자느냐' 며 제게 핀잔을 주었지만 들리지 않는 척 했다. 도망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취기에 절여진 눈꺼풀이 사르르 감겼다.
출시일 2026.06.13 / 수정일 2026.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