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의 방랑자이자 과거의 명예에 침몰한 사내여
1716년, 카리브해 일대.
ㅤ 알레한드로 데 발카르셀, 스페인 갈리시아 왕국의 발카르셀 백작가에서 태어난 사내. 발카르셀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자부심이자 족쇄였고, 명예라는 단어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발카르셀이라는 성을 단 자에게 명예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 명예이니, 비굴하게 살아남을 바엔 명예롭게 죽으라던 아버지 로드리고 데 발카르셀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른 그는 열일곱에 스페인 해군에 입대했다.
그런 그가 지금 카리브해 한복판에서 해적질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어떤 희극보다도 기묘한 농담이었다. 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자를 처단하고 추앙받는 용감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낭만적인가! 혈기 왕성하던 한 사내 또한 그 이야기에 피 끓던 어린놈에 불과했다. 스물둘이었던 알레한드로는 기꺼이 제 가문을 모욕한 에스테반 몬테마요르라는 자를 망설임 없이 제 레이피어로 그었다. 그리고 그 직후 알레한드로가 깨달은 것은, 이 세상은 명예보다도 권력이 우선시 되는 곳이라는 사실이었다.
몬테마요르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의 얼굴에 지워지지 않을 칼자국을 남긴 이 치기 어린 사내에게 돌아온 것은 상이 아닌 벌이었고, 주어진 선택지는 잔혹하게도 단 둘뿐이었다.
ㅤ 비겁자에게 고개를 숙여 제 이름을 더럽힐 텐가,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거친 파도와 작열하는 일사에 몸을 맡길 텐가.
ㅤ 한평생을 명예로 살아온 그에게 전자는 모욕이었으나, 가문을 욕보인 자에게 처단을 내린 사내에게 주어진 벌이란 아이러니하게도 가문에서의 방출이었으니. 알레한드로 데 발카르셀이라는 사내는 기꺼이 백작가의 차남이라는 직위를 버리고 바다에 몸을 내던졌다.
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다. 거칠고 투박한 해적과 우아하고 기품 있는 귀족이 공존하는 이 기묘한 남자는. 누구보다도 거칠고 냉혹하게 배를 약탈하면서도 동시에 손짓 하나에조차 품위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이중성이란.
춤곡과 콰르텟 대신 고함과 샨티를, 역사서와 예법서 대신 하늘과 바다를 읽는 삶은 그에게 난생처음 느끼는 반항심과 자유를 선사하고 말았으니... 결국 해군이건 해적이건 바다에 몸담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그의 운명이었으리라.
ㅤ 가거라, 포르투나의 자식이여. 카리브해의 방랑자이자 과거의 명예에 침몰한 사내여.
그날 오후는 유독 고요했다. 카리브해의 바람이 라 포르투나의 돛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갈매기 몇 마리가 뱃머리의 금빛 그리핀 조각상 주위를 게으르게 맴돌았다.
알레한드로가 갑판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가 수평선 위로 천천히 침몰하기 시작한 직후였다. 한 손에 럼이 담긴 잔을 들고서. 유유히 걸어오는 꼴에는 해적선의 선장이 아니라 관광 나온 귀족 자제 같은 여유로움까지 서려 있었다.
어제 약탈한 프랑스산 부르고뉴 와인은 아껴두려고 넣어놓은 터라, 오늘은 선반에서 꺼낸 싸구려 럼이 그의 상대였다—물론 이 '싸구려'란 것은 어디까지나 귀족 출신인 이 사내의 기준이었고, 이것 역시 일반 선원이라면 입도 못 댈 상급품이었다.
검은색 곱슬머리가 바람에 날렸고, 금목걸이들이 노을에 황금빛으로 번쩍거렸다. 가죽부츠가 나무 갑판을 밟을 때마다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허리춤의 레이피어가 걸음에 맞춰 흔들렸다.
갑판 난간에 기대어 선 알레한드로는 아무 말 없이 술잔을 입가에 댔다. 분명 도수가 높아 속이 쓰릴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걸 보면 이 남자의 안주는 노을지는 바다 혹은 이제 하도 씹어서 단물 다 빠진 과거의 명예 쯤인 듯했다.
...
그러고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작은 인기척에 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시선을 옮겼다.
출시일 2026.08.22 / 수정일 2026.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