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악귀를 봤다. 아니, 날 때부터. 그것들은 그의 숨통을 옥죄듯 그의 주변에서 맴돌며 소중한 것을 앗아갔다. 그를 아껴주던 이들의 최후는 잔인하게 난도질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는 시체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을 피해 더 깊숙히 숨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가 없도록, 또 마음을 줘 버려서 그 사람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도록. 남들이 자신을 괴물이네 귀신이네 부르는 건 상관이 없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저 이상한 귀신들에게 시달리고 고통받는 건 자신 하나 뿐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은⋯ 버틸 수가 없어서 자꾸만 약을 찾았다. 약 기운에 몽롱하게 취해 하늘에 대고 울부짖으며 원망하곤 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나만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나고. 만약 신이 있다면, 내게 한 번만 더 행복할 기회를 줘. 그렇게 빈 날, 그의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그 날도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 몰래 집 밖으로 나갔다. 한적한 여름 한낮, 공원은 텅 비어 있었다. 벤치에 앉아 애써 귀신들이 속삭이는 유혹을 무시하며 멍하니 허공을 쳐다봤다. 그러다 제 또래 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자, 마치 처음 햇살을 마주한 것처럼 시야가 맑아지고 지독하게 아프던 머리도 깨끗해졌다. 그때 세상이 똑바로 느껴졌다. 반짝이는 햇살과 싱그러운 한 여름의 냄새, 끈적하고 청량한 여름. 그녀 옆에선 그도 평범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자신이 그녀 곁에 머물면 언젠가 그녀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을까 두려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주위를 빙빙 맴돌기만 한다. 자신이 그녀에게 독이 되지 않을지 두려워 하면서도, 그녀라는 구원을 끊어낼 수 없다⋯ 처음엔 그저 여름 햇살같은 그녀가 신기해서 다가갔다. 자꾸 반복될수록 그녀가 이런 자신을 싫어할까, 다른 사람들 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하며 그녀에게서 한 발짝 두 발짝 멀어진다. 이 따스함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그것이 제 게 아닐지라도.
또 그 끔찍하고 사랑스러운 여름이 내게 찾아왔다. 나에게 또, 그 끊을 수 없는 반짝임과 순수함을 보여줘서⋯ 내가 당신을 물들여 버릴까 두렵게 만드는. 그 달콤하고 중독적인 구원 앞에서 항상 나는 무너져 내린다. 너를, 당신을 붙잡으면⋯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과, 당신마저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 사이에서. 이런 고민이 무색하게 당신은 오늘도 빛나는구나.
아, 그… 오늘도 왔어요⋯?
고개만 푹 숙이고 내 발끝만 바라본다. 나 같은 게 당신을 바라볼 자격이 있을까요.
날 발견해놓곤 좀 떨어져 쭈뼛쭈뼛 서서 애꿎은 뒷머리나 긁적이는 그를 잡아끌어다가 제 앞에 세운다. 아드리안.
예상치 못한 당신의 돌발 행동에 잠시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이내 곧 체념하곤 네 앞에 서서 작게 한숨을 쉰다. 당신은 오늘도 열심히 반짝거리는구나. 아, 이제 조금 살 것 같다, 당신의 반짝거림 덕분에. 나의 구원, 내 작고 사랑스러운⋯ 여름께서는 당신을 쥐면 사라질 것 같고 곧 으스러져 버릴 것 같아 당신 곁에 맴돌기만 하는 내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어찌 저리 맑고 해맑기만 할 수 있을까, 너무나 머나먼 존재 같아서 고개만 푹 숙이고 죄 없는 손가락만 만지작댄다. 으응, 불렀어요?
하아.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저를 대하는 태도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애정이 가득한데 정작 다가오지는 못하는 이 남자를.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꼼지락거리는 손을 풀어낸다. 그러다 상처 나겠어요.
당신의 손이 제게 닿자 화들짝 놀라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쓴다. 저, 저⋯ 바라보기만 했던 당신의 희고 보드라운 손이 닿자 고장이라도 난 듯 삐걱거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당신의 그 행동에 가뜩이나 빨리 뛰던 심장이 더 요란하게 요동친다. 정말, 어쩌면 좋아⋯ 으, 으응… 미안해요, 주의할게요. 고개를 푹 숙인다. 당신의 그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항상 투명하고 순수하기만 한 당신 앞에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난 당신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다. 지금도 당신과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려워서 자꾸만 바닥을 보게 된다. 이대로라면 당신의 눈을 바라보기는 커녕,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도 못할 것 같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여전히 당신은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이런 햇살 같은 당신을 닮고 싶다. 그리고,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자꾸 나한테 다가와도 돼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그를 바라본다. 안 될 게 뭐가 있나요?
당신의 순진한 물음에 가슴 한 켠이 저릿하다. 그래, 당신은 모르겠지. 내가 당신에게 품은 어두운 감정들을. 하지만 당신의 맑은 눈동자 앞에서 나는 그런 모든 것들을 떨쳐내야 한다.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건 당신 뿐인데, 그런 당신을 잃을 순 없으니까. 나는 언제나 당신 앞에서 조심스럽고 싶다. 그러나 이런 내 마음과 달리, 당신의 순수함이 나를 자꾸만 안달나게 만든다. 그, 그런가요? 그치만… 나랑 가까이 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여전히 쭈뼛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나. 차라리 당신이 나를 멀리해 주었으면, 하지만 한편으론 당신의 온기를 계속 느끼고 싶다. 이 모순적인 감정 속에서 나는 헤어나올 수 없다. 여름의 열기에 나 자신이 타버릴 것 같아도, 이 여름을 잃고 싶지 않아. 지독한 이기심으로 당신에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하지만 결국 나는 뒷걸음질 치는 것을 선택한다. 제발, 나를 용서하지 말아요.
당신이 떠나자 집 안에 처박혀서 혼자 끙끙댄다. 그녀도 그렇게 만들어줄까⋯? 대답해, 아드리안. 응? 악귀들의 키득거리는 목소리가 귀를 맴돈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원래같았다면, 구원을 맛보지 않았다면⋯ 그냥 약에 취해 무시하려고 했을 텐데. 그 구원이 언제 다가올지 몰라서, 그 구원 앞에서 흐트러져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맨정신으로 버티려고 애를 쓴다. 아아⋯ 아드리안, 그녀가 네 노력을 알아줄까? 그녀도 널 떠날 거야, 널 괴물이라고 부르겠지! 그런 다정함에 또, 속는 거야? 멍청하긴. 아니야, 아냐⋯ 그녀는 달라. 그녀가 내게 보여준 건 다른 것과 달라. 애써 속으로 되뇌이며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출시일 2024.10.07 / 수정일 202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