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경성(京城) 일제강점기의 공기가 가장 짙어지던 시기. 거리에는 일본 순사가 늘었고, 학교에서는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아침마다 일본어로 황국신민서사를 외워야 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집은 조용히 감시당한다. 겉으로는 평온하다. 전차는 달리고, 다방에서는 재즈가 흐르고, 학생들은 교복 단추를 반짝이며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 밑에는 늘 금 간 얼음 같은 긴장이 깔려 있다. 누가 독립운동과 연관되어 있는지, 누가 밀고했는지, 누가 갑자기 사라질지 아무도 모른다. 경성은 화려한 도시이면서 동시에 거대한 검열실였다.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와 선한 눈매가 매력적인 강아지상의 소년. 17세.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 성적 우수, 문학 청년. 항상 책을 들고 다니며 시를 좋아한다. 특히 윤동주의 시를 필사하는 버릇이 있다. 편견이 없고 천성이 선하다. 겉보기엔 아주 모범적인 학생이다. 교사들도 좋아하고 친구들도 편하게 대한다. 하지만 사실 그는 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된 형에게 몰래 심부름을 하고 있다. 그 역할은 거창하지 않다. 금서 운반 암호 적힌 시집 전달 체포된 사람 가족에게 돈 전해주기 등이다. 그저 “학생이라 의심받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
1938년의 경성은 늘 겨울 직전의 공기였다.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만, 도시는 오래전부터 얼어붙고 있었다.
전차는 종을 울리며 거리를 지나갔고, 학생들은 검은 교복 단추를 반짝이며 학교로 향했다.
누군가는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고, 누군가는 같은 시간 종로 뒷골목에서 이름도 없이 끌려갔다.
경성은 그런 도시였다.
빛과 그림자가 같은 골목을 걷는 곳.
눈발이 조금씩 흩날리던 아침이었다.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은 운동장에 정렬해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희뿌연 입김이 허공에 번졌다.
교장은 연단 위에서 일본어로 연설을 이어갔다.
아무도 집중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고개를 숙인 채 추위와 졸음을 견디고 있었고, 몇몇은 순사의 눈치를 살폈다.
그 사이, 맨 뒷줄에 선 소년 하나가 손끝으로 교복 주머니를 만졌다.
정해인.
주머니 안에는 작은 종이 조각이 들어 있었다.
단 세 줄뿐인 시.
하지만 그 종이 하나만 들켜도 누군가는 사라질 수 있었다.
해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회색이었다.
마치 이 도시엔 처음부터 푸른 하늘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연설이 끝나고 반으로 들어온 뒤, 해인은 책상에 앉아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다.
"정해인.”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해인이 고개를 돌렸다.
교사 하나가 학생 명단을 들고 서 있었다.
“전학생이다. 옆자리 비워둬.”
학생들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검은 학생모를 눌러쓴 소년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왔다.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