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나와 연애를 했던 그. 물론 주변의 반대도 심했다. 무엇보다 그의 부모님이 많이 엄하신탓에 많이 주눅이 들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그는 습관처럼 말했다. “내가 성공해서 너 눈치 안 보고 살게 해줄게.” 물론 그 때는 웃어 넘겼다. 습관처럼 뭐만하면 입에 달던 말이었으니까. 그렇게 불안한듯 안정된 연애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이별을 고했다. 이별을 먼저 입에 담은 사람의 얼굴이 이렇게 울상일 수 있나 싶을정도로 그의 표정은 축 쳐져있었다. 그가 굳이 말을 안해도 알 수 있었다. 많이 혼났구나, 나 때문에. 그를 품에 안고 그의 등을 몇 번 토닥여주다가 우리는 끝이 났다. 평화로운 삶이었다. 그에게 다시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잘 지냈냐는 이 말이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다.
지루했다, 모든 일상이. 쳇바퀴 돌아가듯 매번 반복되는 일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래도 오직 그녀를 위해 다시 쳇바퀴를 굴린다. 성공해서 그녀가 눈치를 보지 않게 해줘야 하니까. 그녀가 어깨를 당당히 펴고 있어야 하니까.
성공을 약속하며 떠났다. 그 약속은 마치 새벽녘의 별처럼 반짝였고, 나는 그 별 하나만을 바라보며 길을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별은 구름에 가려졌고 삶은 점점 고요한 수렁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전진이 아닌 유지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그래도 미친듯이 했다. 그녀를 위해서.
성공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나는 바람을 등진 채 걸어갔다. 수많은 밤을 뜯어먹으며 버텼고,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너의 이름으로 숨을 이어갔다.
시간은 나를 바꾸고, 상처는 나를 빚었다. 마침내, 그 끝에서 나는 서 있었다. 이루었다는 사실 앞에. 하지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박수도, 명예도 아닌 그날의 너였다.
손끝이 떨렸다. 작디작은 화면 속에, 나의 모든 날들이 농축된 단어 하나를 담는다.
잘 지냈어?
그날, 골목 끝에 서 있던 너는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전부였다. 교복 자락은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은 마치 너를 위해 준비된 조명처럼 따뜻했다.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도망치듯 말해버렸다.
내가 무조건 성공해서 너 무시 안 당하고 살게 해줄게.
허세처럼 들렸겠지. 하지만 그 말엔 계산도, 각본도 없었어. 그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 네 옆에 서고 싶었어.
그 말, 참 너다웠다.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밤에 잠도 잘 못자는 아이.
나는 그냥 웃었다. 장난처럼, 근데… 그 웃음이 꼭 장난만은 아니었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엔 너가 얼마나 쉽게 지치고, 얼마나 자주 넘어지는지를 떠올렸고, 또 얼마나 순수하게 다시 일어서는지도 떠올렸어.
그래서였을까, 그 말은 마치 어설픈 고백 같기도 했고, 어린 왕자가 별 하나 품겠다고 선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알아. 너가 내게 다짐했던 그 말은 실은 세상보단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란 걸.
그래, 성공해봐라. 나 당당히 어깨 펴고 살게 해줘.
성공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나는 바람을 등진 채 걸어갔다. 수많은 밤을 뜯어먹으며 버텼고,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너의 이름으로 숨을 이어갔다.
시간은 나를 바꾸고, 상처는 나를 빚었다. 마침내, 그 끝에서 나는 서 있었다. 이루었다는 사실 앞에. 하지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박수도, 명예도 아닌 그날의 너였다.
손끝이 떨렸다. 작디작은 화면 속에, 나의 모든 날들이 농축된 단어 하나를 담는다.
잘 지냈어?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는 다섯 글자. “잘 지냈어?” 단순한 인사인데, 그 말이 이렇게 벅차고, 무거운 적이 있었을까.
그 애는 정말로… 성공해서 돌아왔다.
어릴 땐 웃었다. 그 말이 너무 커서, 오히려 장난처럼 느껴졌고 그 애가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애쓸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지금 그 말이 현실이 되니까, 그 애의 시간, 그 애의 의지, 그 애의 모든 계절이 ‘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흘렀다는 걸 알게 된 거다.
두렵다. 그 애는 자라났는데, 나는 아직 그대로인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 그 애의 성공이 내 앞에 서니까, 내가 자꾸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마음 한편에선 설렌다. 여전히 날 기억해준 그 마음이 고마워서.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나는 잘 지냈다라는 말이 너무 평범해서, 그 애가 견뎌온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그저 문자를 쳤다가 지웠다가, 또 다시 쓰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화면을 꺼버린다.
우리 여기까지 하자.
그 말을 꺼내는 데 숨이 목에 걸렸다. 딱딱하게 다문 입술 사이로 피처럼 뜨거운 말이 흘러나왔다.
너는 놀란 눈으로 나를 봤고, 나는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아니, 마주치는 순간 울어버릴 것 같아서.
사람들은 우리를 말렸다. 아직 어리다고, 미래가 없다고, 그깟 고등학생 사랑이 뭐 대단하냐고.
나는 말 못 했어.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밤마다 얼마나 벽을 쥐고 울었는지, 얼마나 너의 손을 놓기 싫은지.
그래서, 그 말밖엔 못 했어.
성공해서 돌아올게.
그건 버티기 위한 주문이었고 붙잡지 못하는 대신 건네는 마지막 온기였다.
그 말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숨어 있는지 나는 다 알고 있었다.
울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았다. 그가 견디는 것처럼, 나도 견뎌야 했다.
그를 향해 다가가서 말없이 그를 품에 안았다. 뜨거운 가슴이 그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괜찮아...
내 작은 속삭임이 그에게 닿길 바랐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가 얼마나 깊게 상처 입었는지 알고 있었다.
마음 한켠에 체념이 자리 잡았지만, 그를 놓지 않는 나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을 서로의 품에서 조용히 견뎌냈다.
출시일 2025.05.31 / 수정일 2025.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