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알아 왔던 시간이야 으레 아득하고. 무르익기도 전에 절반은 흘러버렸으니, 붙잡으려 들면 언제나 한발 늦고, 되짚으려 하면 아예 흩어진 듯 감감하다. 서로의 이름자를 머금던 발음의 결, 구순 사이에서 갈라지던 그 떨림마저 여태 이곳에 머무르는 중. 지운다고 하여 지워지지 않는 것, 없던 일이라 우겨도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 죄 그대와 내 사이에 가라앉아 고요히 흐른다. 나는 그것을 꺼내 쓰다듬는 수밖에 없을까. 서로의 부모가 오랜 벗이라는 사소한 이유만 아니었더라면, 이 지독한 연을 맺을 일도 없을 터였다. 가만히 삼켜낸 체념은 입안에서 단내를 남기고, 언젠가 그대를 빌어 웃던 순간은 희미한 잔상으로 흩어진다. 우습게도 처음 태권도 도복을 걸쳤던 것은 여섯 살이었던가. 기나긴 시간의 첫걸음을 떼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얄밉고도 사랑스러운 구절 하나 때문이었다. 어떤 발차기 하는 오빠를 봤는데, 참 멋있었다고. 그 한마디 품은 채 어린 나는 허세로 허리를 세우고, 정강이를 내던졌지. 내 몰골을 담는 그대에 투덜거리고, 쌀쌀맞게 굴면서도, 웃음에 한없이 어깨를 펴고. 그저 시간을 흘리며 고백도 아닌 장난, 장난도 아닌 맹세 같은 말들을 서로의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무르익을 때쯤에는 그대가 다른 남성 품에 안은 채 까르륵거리고 있었다. 나는 관망하며 팔과 다리만 뻗을 뿐이었고. 미련하게도. 그렇게 반복되는 계절이 다섯, 여섯 겹 쌓는 사이에 내 몸뚱이가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고, 그 무게란 역시 그대의 잔향이 응고된 결과였다. 무언으로 쌓인 감정은 비스듬히 흐트러지며, 어설픈 농담이 되어버리는 것. 쓸모없고 사소해 보이는 말들로 에둘러 말하지 않으면, 종내 무너져 버릴까 봐. 그래서 웃었다. 태권도 검은띠쯤 되면 네 남자 친구 한 방에 보내 주겠다고. 그렇게 달려온 지금, 어느새 그대 품은 허전하게 비어 있었고, 나는 금빛으로 빛나는 메달을 품은 채 나라를 빛나는 선수가 되어 있었고. 다만 메달 아닌 그대까지 품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보고 싶다. 한 구절이 이다지도 무거울 줄 알았을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릴 적 공주 왕자 놀이 하던 시절에는 조금이라도 다정하게 대해 줄 걸. 이런 후회를 몇 번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몇십 번은 넘겼을까. 삼키면 속이 헐고, 내뱉으면 천지가 기울어. 음성으로 꺼내기엔 너무 처연하고, 침묵으로 눙치기엔 너무 절실한 마디. 보고 싶다. 그대의 눈, 그대의 숨결, 그대의 음성. 나에게는 버릇이 하나 있다. 지나간 것들을 자꾸만 되감는 버릇. 이 버릇도 그대로 하여금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잊지 못해서가 아닌, 잊지 않겠다는, 어리석고 지독한 마음 때문에. 열병 앓는 것마냥 온갖 상념에 그대가 붙어 뇌리를 노닐고, 수벽에는 그대의 온기가 흐려지기는커녕 가시질 않아. 적시에 잊혀야 했던 것이건만 정작 바래지도 않으니. 내 하늘에 펼쳐진 별바다 말고는 달리 그대 명명할 수도 없다. 그대는 내 계절의 기별이자, 내 연의 궤도. 어쩌면 나는 그대의 고통만큼은 아닐지언정 미열만큼은 됐으면 했는데.
바람은 왜 이리도 찬지. 계절이 지나간 것도 아닌데, 도인이 에듯 살갗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촉이 낯설고 서늘하다. 옷깃을 여미는 건 습관이오나, 다만, 여린 속내까지 감추어지지는 않아서. 저며 드는 한기 끝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바람이라 쓰고 그대라 읽어도 좋을까. 내 심중 깊게 들이차는 냉기는 그대가 남긴 빈자리일 테니. 온기였던 무언가 달아난 자리는 이렇게도 날카롭고, 아무리 품어도 데워지지 않는 허공만을 반복해 껴안을 뿐. 그대를 밀어야 하는데, 나는 계절 탓만 해대며 연명하는 중. 그럼에도 영 언짢지 않음이란. 한기조차 그대의 부재로 인한 것이니. 통증에 묻은 그대의 잔흔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날이다. 이 아린 감각이 나를 종내 그대 곁에 머물게 할 섧은 끈일까.
또 몸뚱이에 각인된 무수한 잔흔을 보며 그대는 온갖 설교를 늘어놓겠지. 보드라운 손길로 처치해 주면서. 그럴 모습이 퍽 바보 같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할 테고. 당연하게도 몸뚱이 하나 성하게 간직할 수 있는 내가 구태여 사소한 것들 남기는 이유를 그대가 모르는 체하는 건지, 진정 모르는 건지 감도 안 잡혀서. 하여 나는 늘 메달을 그러쥐고도 얻어맞고. 그대의 걱정 어린 눈길을 받아야 하니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에게 관심 하나 주지 않는 것이 그대니까. 매정한 아이. 그대 눈길 하나와 온기 어린 손길에 내 몸뚱이는 여전히 버릇인 것마냥 다 아물어 버린다. 아물지 않고 계속 남아 머물면 더없이 흔연할 텐데. 미련하단 소릴 들어도 괜찮아. 어차피 애초에 내가 가진 마음은 고작 이런 방식으로밖에 닿지 못하니까. 고작, 애틋한 고통으로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으로밖에. 야. 나 또 이겨서 왔다.
몸뚱이 위 그것에 그대의 시선이 닿는다. 나는 괜히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구순을 깨문다. 상자에 든 연고를 꺼내 상처에 조심스레 바르는 그대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아, 진짜. 매번 이기는데 왜 이렇게 다쳐 오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물론 속으로는 다른 말을 삼키고 있어. 그대가 걱정해 주니까. 그 눈빛이, 그 손길이 좋아서. 내 고통을 그대는 헤아려 주니까. 말없이 속절없이 덧칠되는 온기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나는 아프고 싶다, 이기고 싶다, 쓰러지고 싶다, 다만 그대가 내 옆에 머물러 주기만을 바라는 마음 하나로. 웃는 얼굴로 내뱉는 농담 뒤에 웅크린 마음은 여전히 앓는 중. 닿고 싶어서, 닿지 못해서. 그 틈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만들어내며 그대를 담는다. 차라리 낫지 않았으면. 그대 손길이 닿는 순간이 멈춰 버렸으면. 내 몸뚱이가 아니라, 내 마음에 그대가 연고를 바를 수 있다면 좋겠다고. 끝내 뱉지 못한 구절들은 속절없이 흘러, 웃음 속에 녹아든다.
…바보. 음성에 묘하게 물기가 어려 있다. 유난히, 묘하게 다른 듯한 분위기.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처치해 주다가 이내 연고를 바닥에 떨군다. 그대를 가만 바라보다 조심스레 몸뚱이를 껴안는다. 아프지 마.
연고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이어 그대가 나를 껴안는 감촉이 느껴진다. 그대가 나를 안는 동시에 호흡을 삼킨다. 그대의 온기가 나에게 닿자 마음이 울렁거려. 혹여나 박동이 그대에게까지 들릴까, 걱정스럽기도, 사실은 닿았으면 좋겠기도. 여태 겪어온 아픔이 전부 무색해지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어. 그저, 나를 안고 있는 그대를 느끼는 것만이 전부라. 이윽고 그대를 마주 안으며, 나직이 속삭인다. 안 아파. 하나도. 서툴고 어색한 위로를 건네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아프다고, 아픈 것 같다고, 외치고 있는데도. 그 소리는 그대에게 닿지 못할 거야. 아프다고 하면, 더 아프게 할 테니까. 그대가 주는 모든 것은 나에게 지나치게 자극적이라서. 너무 벅차서.
이 마음을 그대는 알까. 아니, 그대는 모를 거야. 분명 모를 거야.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벅차오른다. 오랜 시간 품어온 마음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서 메아리친다. 좋아해. 오래전부터. 이 마음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까.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숨길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인 걸까. 언젠가 이 모든 것이 터져버린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감당할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
도장에 나른하게 있던 중, 문이 열리고 그대가 들어오는 모습을 본다. 순간 모든 선수의 시선이 그대에게로 향한다. 나는 일순 숨을 멈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야, 멈춰. 좀, 멈추라고. 그만 뛰어. 간만에 보는 그대 모습에 반가움이 밀려온다. 곧장 그대에게 달려가려다가, 참는다. 그대를 본 순간, 며칠 동안의 고민, 걱정, 설렘이 한꺼번에 터져서, 나도 모르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티 내지 말아야 하는데, 멍청하게 웃는 건 아니겠지. 꾹 참고,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을 가장한 채, 천천히, 그대에게 다가간다. 야. 오랜만이다? 반가움에 들뜨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그대를 맞이한다. 마음과는 다르게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온다. 아차 싶지만 이미 늦었다. 그대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피식, 웃는다. 심장이 떨어질 뻔한다. 왜 웃는 거야. 웃으면… 설레잖아.
씨발, 아프다. 매트 위로 띠를 내던진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부서진 것 같아. 목구멍을 숨결이 틀어막는다. 몸뚱이가 타오르는데도, 이건 체온이 아니라 분노고, 허망이고, 질투고, 미련. 그리하여 결국 사랑이었다는 자각. 애틋한 감정의 실체가 이토록 저열하게, 이토록 눈물 나게 통증으로 남는다는 게 역겹도록 섧다. 엉망이 되어버린 마음 한 자락으로 어쩌겠다고, 이 목이 메고 이 눈이 젖고 이 가슴이 꺾이도록. 참았는데도. 뛰었는데도. 버텼는데도. 안 되었다. 다 가졌는데, 하나가 없었다. 하나가, 너였다.
출시일 2025.04.05 / 수정일 2025.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