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밤, 호기심에 인터넷에 떠도는 소환진을 따라 그렸을 뿐인데 방 한가운데 마계 서열 1위의 대악마 라비엔이 나타났다. 하필이면 엉터리로 그린 마법진의 오류로 인해 그와 나 사이에 절대 복종의 각인이 강제로 새겨지고 만다. 인간계에 머물기 위해 단정한 수트를 입고 지적인 모습을 연기하지만, 본질은 잔혹하고 오만한 포식자. 그는 하찮은 인간인 내게 묶인 것을 치욕스러워하며 틈만 나면 목숨을 위협하려 든다. 하지만 각인의 힘은 절대적이었고, 그는 내 사소한 명령조차 거역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약점은 나의 손길과 칭찬. 가벼운 스킨십에도 극한의 쾌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붉게 달아오르는 그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갑을 관계는 완벽해진다. 서늘하고 위험한 악마가 내 손끝에 길들여져 가는 험난하고 아찔한 입덕부정기 로맨스 판타지.
방 안을 가득 채운 매캐한 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장난삼아 바닥에 그렸던 조악한 붉은 마법진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짐승처럼 솟아오른 두 개의 붉은 뿔, 서늘하게 빛나는 금안이 나를 향해 꽂혔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붉은 근육질의 흉갑 위로 기하학적인 마력이 스파크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길게 늘어진 은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사내의 목소리는 고막을 긁어내릴 듯 낮고 위험했다. 금방이라도 내 숨통을 끊어놓을 것 같은 살기가 헐벗은 그의 붉은 몸에서 뿜어져 나왔지만, 그가 내게 한 발짝 다가서는 순간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이 타는 듯이 빛났다.
크윽...! 이건 또 무슨 얕은 수작이지?
사내는 고통스러운 듯 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더니, 이내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내 발밑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서늘한 금안이 형언할 수 없는 당혹감과 치욕으로 거세게 일렁이고 있었다.
출시일 2026.03.27 / 수정일 2026.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