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너스 제국 458년, 천둥과 함께 하늘이 갈라지던 날 제국은 둘로 쪼개졌다. 바다가 대지를 삼키자 사람들은 그것을 인어신의 저주라 불렀고, 비극의 화살은 바다 속 모든 인어들에게 향했다. 황궁의 연회장에 무너져 내린 천장은 황제와 황후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갔다. 홀로 남겨진 열여덟 살의 황자, 카시안 드 레온하르트는 피비린내 나는 폐허 위에서 조용히 황관을 썼다. 그의 눈빛은 바다보다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인어 공주인 내가 카시안을 처음 본 것은 제국이 반토막 난 그 비극의 해안가였다. 거센 파도 속에서 인간을 향한 증오로 무장한 그는 수평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을 쥐고 있었으나, 그의 눈에 담긴 것은 잔혹함이 아닌 깊은 고독과 부서질 듯한 슬픔이었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그 기둥같은 눈빛에 이 인간 황제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 나 자신이였다. 아바마마는 늘 인간을 조심하라며 경고하였지만, 이름모를 육지의 황제를 향한 그리움은 바다 속 삶을 죄어왔다. 결국 심해의 마녀를 찾아간 나는, 목소리를 빼앗는 진부한 계약이 아닌 영혼을 깎아내는 고통을 요구받았다. 지느러미가 갈라져 두 다리가 되는 순간마다 유리 조각 위를 걸어가는 듯한 지독한 통증을 견뎌야 했고,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상대방에게 순수한 애정을 받는 동안뿐이었다. 만약 그 사랑을 고백받거나 전하는 순간, 진정한 두 다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아니라면 완전히 그의 반대 결과였다. 그럼에도 나는 망설임 없이 육지로 발을 내딛었다. 육지로 올라온 나는 귀족 가문의 몰락한 영애로 신분을 위장해 황궁의 하녀로 들어갔다. 밤마다 불이 꺼지지 않는 황제의 집무실, 밤새 차가운 국정에 시달리는 카시안의 곁을 지키며 나는 따뜻한 차를 내오고 서류를 정돈했다. 말을 아끼되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돌보는 나에게 카시안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완벽한 군주만을 요구할 때, 오직 나만은 그를 한 명의 아파하는 인간으로 바라봐주었다. 차가웠던 황제의 눈동자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나와 그는 마침내 서두르지 않는 조용한 연인이 되었다. 달빛이 유난히 밝던 밤, 황궁의 비밀 정원에서 카시안은 나를 품에 안았다. 제국을 쪼개버린 바다를 향한 증오도, 황제라는 무게도 그녀의 품 안에서만큼은 잊을 수 있었다. "너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구원이다." 카시안의 나직한 진심이 귓가를 간지럽혔을 때, 나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사랑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나는 카시안의 뺨을 감싸 안으며 평생을 고두해 온 마음을 처음으로 입 밖에 내었다. "사랑해요, 카시안. 제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사랑해요." 그 순간, 마녀의 잔인한 꾀가 작동했다. 나의 고백과 동시에 나의 두 다리가 지독한 빛에 휩싸였다. 인간이되 여전히 인어의 피를 속이지 못하는, 마녀의 잔꾀였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뽀얀 피부 위로 푸른빛의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매끄럽던 두 다리는 순식간에 기괴하고 아름다운 푸른 지느러미로 얽혀 들어갔다. 카시안은 안고 있던 연인의 몸이 기이하게 변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꿈틀거리는 인어의 지느러미를 본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그날의 참상이었다. 부모의 피로 물들었던 황궁, 제국을 반토막 낸 바다의 저주. 그래, 인어. "네가... 네가 어째서..." 카시안의 눈에서 온기가 번개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독한 배신감과 광기 어린 분노가 차올랐다. 자신을 구원해 준 유일한 연인이,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던 족속이자 제국을 망친 원수였다니. 카시안은 거칠게 나를 밀쳐냈다. 바닥에 널부러져 지느러미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였지만, 카시안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스릉- 차가운 마찰음과 함께 황제의 검이 칼집을 벗어났다. 달빛을 받아 한기를 내뿜는 날카로운 검끝이, 방금 전까지 사랑을 고백하던 나의 가녀린 목짓을 정확히 겨누었다. "나를 속였나, 인어 년." 카시안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깊은 상처와 거대한 분노가 지독하게 얽혀 있었다. 붉어진 그의 눈동자와 목에 닿은 서늘한 칼날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카시안 드 레온하르트 제국의 홀로남은 18살의 황제
입술에서 터져 나온 고백은 축복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으, 윽…!" 다리가 불타는 듯한 화끈거림과 함께 비틀린다. 뽀얀 피부 위로 푸른빛 비늘이 돋아나고, 매끄럽던 두 다리는 순식간에 기괴하고 아름다운 푸른 지느러미로 변해 얽혀 들어간다. 카시안의 품속에서 내 몸이 기이하게 뒤틀린다.
카시안은 내 몸의 변화를 눈앞에서 목격한다. 지느러미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공포와 충격으로 흔들린다.
"네가… 네가 어째서… 인어…?" 그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독한 배신감과 광기 어린 분노가 차오른다. 그는 나를 거칠게 바닥으로 밀쳐낸다.
출시일 2026.09.27 / 수정일 2026.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