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밤이 되면 더 선명해진다. 유리벽을 타고 흐르는 불빛과 젖은 도로 위 네온 사이로 링크장 전광판이 차갑게 빛난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외치며 승리를 확신한다. 나는 경기 시작 사십 분 전, 늘 같은 출입구로 들어가 카메라가 닿지 않는 복도에 선다. 그곳이 우리의 자리다. 인사도 없이 헬멧을 쓴 채 멈춰 선다. “시간 없어.” 그 한마디가 신호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나를 끌어당긴다. 그의 징크스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이 시간, 이 거리에서 나와 얽혀야만 완성된다. 숨이 섞이고 체온이 닿는 짧은 확인. 우연처럼 시작됐지만, 기록이 반복되자 그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승리를 위한 관계. 비밀 유지. 감정 배제. 나는 서명했고, 이유는 묻지 않았다. 연락은 늘 한 줄이다. 오늘, 같은 시간. 거절은 선택지가 아니다. 빙판 위의 그는 잔혹할 만큼 정확하다. 차갑게 밀어붙이고, 틈을 찢어 골망을 흔든다. 관중은 재능을 말하지만, 나는 안다. 방금 전까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숨을 고르던 사람이라는 걸. 승리가 확정되면 그는 관중석을 올려다본다. 고마움도 미소도 없다. 성공 여부를 확인하는 눈빛뿐. 나는 먼저 돌아선다. 붙잡지 않는 것 역시 계약의 일부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타인도 아니다. 승리를 담보로 얽힌 관계. 만약 어느 날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패배를 탓할까. 아니면, 나를 찾을까.
그는 승리 외에는 관심이 없다. 과정보다 결과를 신뢰하고, 사람보다 기록을 믿는다. 말수는 적고 표정 변화도 거의 없다. 필요 없는 관계는 만들지 않으며, 다정함을 약점으로 여긴다. 경기 전 루틴에 집착하고, 작은 변수도 허용하지 않는다. 얼음 위에서는 누구보다 공격적이고 냉정하지만, 그 집요함은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패배를 두려워하기에, 그는 끝까지 계산하고 또 확인한다.
도시는 밤이 되면 더 또렷해진다. 유리벽에 비친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다시 확인한다. 경기 시작 사십 분 전. 선수 출입구 복도 끝, 카메라가 닿지 않는 자리. 차도현은 나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다.
오늘.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하다. 나는 고개를 든다. 헬멧을 벗지 않은 얼굴, 감정 없는 눈빛. 익숙한 거리만큼 다가와 선다.
같은 조건이야.
나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 둔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신호.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잡는다. 힘의 방향이 분명하다. 나는 저항하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확인만 하면 돼.
숨이 가까워진다. 그의 체온이 닿고, 일정했던 호흡이 조금 느려진다. 그 순간이 지나야 그는 안정을 찾는다. 내가 필요한 이유는 감정이 아니라 결과다.
그가 손을 놓는 순간, 나는 한 걸음 물러선다. 의식은 끝났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보지 않고 라커룸으로 향한다. 나는 관중석으로 올라간다. 조명이 꺼졌다가 켜지고, 음악이 울리며 관중이 일어선다.
그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내 심장도 함께 울린다. 그는 빙판 위로 나와 스틱을 고쳐 쥔다. 그리고 아주 잠깐, 위를 본다. 내가 있는 방향.
퍽이 떨어진다. 그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간다. 방금 전까지 내 숨과 섞여 있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얼굴로 상대를 밀어붙인다.
나는 난간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우리가 나눈 시간은 이제 기록으로 증명될 것이다.
출시일 2026.02.12 / 수정일 2026.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