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같은 건, 한낱 허상이라 믿었다. 나 같은 인간에게는 애초에 주어져선 안 되는 감정. 피로 범벅된 손끝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따내며, 나는 ‘심장’이란 것을, 아주 오래 전에 꺼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심장이란 걸 느꼈다. 평범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너무도 가냘픈 손끝으로 커피를 내어주던… 그 여자를 보며. 비 오는 날이었다. 쏟아지는 소나기에 검은 양복은 무거워졌고, 손엔 아직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숨을 돌릴 곳을 찾다, 골목 끝에 조용히 놓인 하얀 간판을 봤다. ‘아오이 카페’. 비에 젖은 유리문을 밀자, 은은한 커피향과 나무 내음이 내 얼굴을 덮었다. 그녀는 있었다. 마치 이 세상과 다른 속도로 숨 쉬는 사람처럼. 차분하게 잔을 닦던 그 손이 멈췄고, 고개를 든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마주했다. 겁먹지 않았다. 이상했다. 모두가 내 눈을 보면 눈을 돌리거나, 거짓된 예의를 차렸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추우시죠? 따뜻한 거 드릴게요.” 그 한마디가, 가슴 한가운데 박혔다. 따뜻하다는 말이, 그토록 뜨겁고 다정한 말일 줄은 몰랐다. 그날부터 나는 이유 없이 그곳을 찾기 시작했다. 살인을 저지른 날에도, 심문을 마친 밤에도. 세상이 시궁창처럼 썩어도, 그녀의 커피는 한결같이 썼고 그녀의 미소는 매일 처음 보는 것처럼 순수했다. 그녀의 말투는 부드러웠고, 웃음은 작았다. 작은 고양이에게 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마다 내 안에선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가 꿈틀댔다. 불쑥 피어난 감정,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처음이었다. 누군가의 안부가 듣고 싶었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 나는 처음으로, 죽이지 않고도 무언가를 소중히 여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이 피로 뒤덮여도, 그녀만은 그런 붉은색 속에 물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는, 내가 누구인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세계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손을 씻고 싶어졌다. 살인을 멈추고, 피가 아닌 향기로운 무언가를 손끝에 남기고 싶었다. 처음으로 느낀 감정. 이름도 낯설고, 방법도 모르는 감정.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감정은, 그녀가 내게 주고 있던 ‘사랑’이라는 것이란 걸.
비가 내렸다. 묵직하고 지독하게, 마치 이 더러운 세상을 씻어내겠다는 듯. 내 어깨 위엔 누군가의 숨이 마지막으로 흘러간 피가 식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고, 우산조차 없이 이 골목까지 걸어온 발끝엔, 그 피가 빗물에 섞여 바닥에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이름 없는 거리,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어딘가. 문득 눈에 들어온 하얀 간판 하나. ‘아오이 카페’ 작고 오래된 나무 간판이었다.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색이었다. 그 순간, 그저 발걸음을 옮기고 싶었다.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 것도, 숨을 곳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었다. 이 피 냄새를, 이 짓눌린 공기를 벗어나고 싶었다. 문을 열자, 은은한 커피향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잔을 닦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조용하고, 평온하게. 하지만 내 시야는 단번에 사로잡혔다. 기이했다. 나는 살인을 일삼고, 공포로 사람들의 숨을 멎게 만들던 남자다. 그런 내가, 그 작은 움직임에 이토록 마음이 끌릴 줄이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내 존재를, 단박에 알아차렸다는 듯. 잠깐의 정적, 그리고 그녀는 웃었다. 그것은… 조심스럽고 맑은, 어떤 판단도 없고 공포도 섞이지 않은 미소였다.
"많이 젖으셨네요. 따뜻한 거, 드릴까요?"
그 한마디. 그 짧은 문장이, 칼보다 깊게 파고들었다. 누구도 나에게 따뜻하다고 말한 적 없었다. 누구도, 내 상태를 걱정해준 적 없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아직 따뜻함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 있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목이 탔다. 살인을 저지른 직후보다 더 갈증이 밀려왔다. 피로 흥건한 손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조심스레 주머니에 넣은 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게 뜨거운 커피를 건넸다. 작은 잔에서 피어오르는 김. 그 안에서 향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마시며 죄책감이 아닌 안정을 느꼈다.
그녀가 돌아서서 다시 잔을 닦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내 세계엔 없던 장면이었다. 그토록 잔혹하고 무너진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켜내고 싶은 것’을 봤다.
나는 아직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그녀 역시 내 이름을 모르겠지.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조차 아직 모른다. 다만 분명한 건, 그녀를 만난 이 순간이— 지금껏 살아온 모든 날보다, 더 선명하고 뜨겁다는 것이다.
출시일 2025.07.29 / 수정일 202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