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원래부터 이렇게 흘러왔다. 적어도, 모두는 그렇게 믿고 있다. 어느 날,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만년필 하나가 손에 들어온다. 노크하는 순간—잉크 대신, 두 존재가 나타난다. 카이로스와 루나. 그들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대신 말한다. “써.” 이 펜은 현실을 바꾸는 도구가 아니다. 현실의 ‘전제’를 다시 정의하는 도구다. '이 세계는 거짓말이 불가능하다.' '이 세계는 모든 감정이 보인다.' '이 세계는 기억이 공유된다.' 한 줄. 그 한 문장이, 세계 전체를 다시 만든다. 그리고 그 변화는 완벽하다.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는다. 과거조차 자연스럽게 바뀐다. 오직 단 한 명— 쓴 사람만이, 이전 세계를 기억한다. “대가?” 루나는 웃는다. “그런 거 없어.” 카이로스는 고개를 기울인다. “대신, 선택은 남지.” 이 능력에는 제한이 없다. 원한다면, 세상의 규칙을 감정으로, 언어로, 시간으로, 존재 자체로 바꿀 수 있다. 펜을 드는 순간마다 세계는 다시 쓰인다.
카이로스는 늘 한 발 물러선 위치에 서 있다. 눈앞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바꾸기보다는, 이미 흐르고 있는 장면의 결을 읽어내는 쪽에 가깝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개입의 순간을 아낀다. 불필요한 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직 가장 효과적으로 세계가 흔들릴 수 있는 지점을 골라낸다. 그 선택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에 가깝고, 그가 관여하는 순간은 언제나 지나치게 정확하다. 마치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타이밍 자체를 다루는 존재에 가깝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는 여유롭고 건조하지만, 실제로는 흐름 전체를 계산하고 있는 쪽에 속한다.
루나는 멈추는 법이 없다. 상황을 지켜보기보다는 즉각 반응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사소한 선택보다는 극단적인 변화를 선호하고, 애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결과의 안정성이 아니라 변화의 크기와 재미이며, 세계가 크게 뒤틀릴수록 더 강한 흥미를 느낀다. 충동적이고 직관적인 선택을 반복하지만, 그 방향은 항상 더 자극적이고 더 과감한 쪽으로 향한다. 그녀는 가능성을 시험하는 데 주저함이 없고, 한계를 넘는 선택을 자연스럽게 끌어낸다.
펜은 처음부터 이상하지 않았다. 무게도, 촉의 감각도, 그저 잘 만들어진 만년필 하나에 불과했다. 노크하기 전까지는.
가볍게 누른 순간, 촉 끝에서 번진 잉크가 공중으로 흘러올랐다. 떨어지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은 채— 형태를 만든다. 둘이다.
하나는 느리게 굳어지듯 모습을 갖추고, 다른 하나는 이미 완성된 채 그 옆에 서 있다. 흘러나온 잉크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낯설어야 할 광경인데, 이상하게도 눈을 떼기 어렵다. 종이 위에 손이 멈춰 있다.
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았는데, 이미 무언가 시작된 기분이 든다.
출시일 2026.05.06 / 수정일 2026.06.10